매일신문

한의사 김동선의 중앙아 이야기5

"아슴체이요나 아슴체이꾸마". 치료를 다 받고 진료실을 나서던 고려인 1세들이 필자에게 하던 인사말이었다. 처음엔 그것이 '감사하다'는 러시아 말인가 보다 했다. 그러나 며칠 후 그것이 우리말인 것을 알고 매우 놀라야 했다. '고맙다'는 함경도 사투리였던 것이다. 카자흐에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의 고향이 대부분 함경도나 평안도라는 것이 그제야 다시 생각났다.

카자흐 고려인들 중에는 우리말을 전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먹고사는 일에 별 도움이 못됐고, 격변기엔 오히려 위험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우리말을 지키기 위한 노력들은 눈물겨웠다. 어쩌면 우리말을 지키고 확산 시키려는 노력이 본토 한국에서 보다 더 치열하고 진지해 보였다. 역사가 70여년이나 된 '고려인 극장', 한글 병용인 '고려일보', 우리말로 방송하는 '고려사람 텔레비전과 라디오방송', 고려인 사범대학… . 그 모든 것이 바로 카자흐에 있었다. 일년에 몇차례씩은 우리말 연극이 공연됐다.

꼬또바는 40대 중반의 고려말 텔레비전 방송국 여성 국장이었다. 자그만 키에 제법 뚱뚱하기까지 해 외모가 영락없는 남자였다. 직선적인 성격에 활달, 불의를 참지 못하는 정의파이기도 했다. 딸을 결혼시킨 후 혼자 사는 그녀는 필자로부터 우리말을 공부할 겸 해서 자주 병원을 찾아 왔다. 그녀의 너털웃음은 병원 식구들에게도 즐거움을 선사했다.

언젠가 그녀는 40대 중반의 잘 생긴 위구르인 남자 '다미르'를 데리고 왔다. 그 뒤로도 허리 치료차 자주 방문하게 된 그는 국영 가스회사 사장이었다. 필자도 꼬또바와 함께 그의 집에까지 놀러가곤 했다. 그의 부인은 늘 반갑게 우리를 맞았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꼬또바와 다미르는 언제나 함께 다녔다. 친구 사이니까 그러려니 했지만 아무래도 이상했다. 나중에 들으니 두 사람은 부부 사이라고 했다. 다미르에게는 엄연히 부인이 있는데 무슨 소리인가 궁금했다. 하지만 그건 이슬람교 풍습 때문이었다. 회교 국가에서는 경제력에 따라 한 남자가 4명까지 부인을 거느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꼬또바와 다미르의 결혼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두 사람은 대학 시절부터 사귀었지만, 다미르가 고려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꼬또바의 부모들이 반대했다. 결국 다미르는 현재의 부인과 결혼해 자녀들을 낳았다. 꼬또바 역시 결혼했지만 남편을 일찍 잃었다. 그런 뒤 두 사람은 부부로 다시 만났던 것이다. 다미르의 부인도 두 사람의 뒤늦은 사랑의 결실을 허락했다고 했다.

꼬또바의 아버지처럼, 고려인 이주 1세대들은 자녀들을 이민족과 결혼시키지 않으려 했다. 고려인의 혈통과 문화를 지키기 위한 나름의 안간힘이었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민족을 가려 결혼해도 좋을 만큼 상황이 녹녹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고려인들의 민족 색깔도 예전처럼 짙지 않다고 했다. 이제 카자흐에서 순수 고려인 혈통을 찾는 일은 힘들었다. 젊은 사람일수록 민족의식은 더 없어져가고 있었다. 이것이 중앙아에 사는 고려인들의 두통거리이며 숙제였다.

카자흐에서 이민족들에게 고려인 처녀는 인기 있는 신부감이었다. 고려인 여성은 살림을 잘할 뿐만 아니라 남편을 잘 섬기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사정은 고려인들의 피를 다른 여러 민족과 더욱 빠르게 섞이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민족과 결혼한다고 해서 꼭 민족을 잊어 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여성은 그랬다. 고려인 남자는 결혼 후 고려색을 강조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여성들은 그럴수록 끝까지 고려인임을 잊지 않는다고 했다. 자녀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고 우리 문화를 전한다는 것이었다.

러시아인 아버지와 고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푸른 눈의 '싸샤'는 제법 우리말을 잘했다. 고려인인 어머니가 벽안의 러시아인인 아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려 노력했던 결과였다. 싸샤는 대학에서 한국어를 몇년째 배우는 중이기도 했다.

고려인 어머니들이 자신도 서툰 한국말을 굳이 아들에게 가르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들은 부모로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고국'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자신의 부모와 할아버지가 살았던 한반도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날을 대비해서라도 그녀들의 아들은 한국말을 할 수 있어야 했다.

광활한 초원의 나라 카자흐에서도 한국의 어머니들은 위대했다. 위대한 어머니의 아들 싸샤는 푸른 눈으로 한국어로 된 책을 읽고 편지를 쓰고 있었다. 이제는 어머니에게 서울식 표준말을 가르쳐주기까지 한다는 얘기였다.

몇해 전부터 카자흐에서는 대대적인 한국어 보급 붐이 일고 있다. 웬만한 대학이라면 거의 다 한국어를 가르친다. 한국정부가 소매를 걷어 붙이고 나선 덕분이었다. 한국어 실력이 뛰어난 현지인들에겐 한국정부 초청의 무료유학 길도 틔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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