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리 부인' 하면 어린이들의 '위인 전기' 목록에 빠지지 않는 훌륭한 과학자로 알려져 있다. 독립을 잃은 조국 폴란드에서 태어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방사성 원소인 라듐을 발견, 최초로 두 차례나 노벨상을 수상한 그녀의 전기 속에는 남편 피에르 퀴리가 등장한다. 그러나 피에르 퀴리는 그녀와 함께 노벨상을 공동 수상한 뒤 짐마차에 부딪혀 짧은 생을 마감함으로써 아내의 그늘 속에 가리워져 왔다.
'내 사랑 피에르 퀴리'(금내리 옮김, 궁리 펴냄, 240쪽, 8천500원)는 마리 퀴리가 남편이 죽은 지 17년 후 그를 기리며 쓴 전기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아내의 명성에 가려 잊혀졌으나 순수한 열정으로 과학자의 길을 갔으며, 그보다 더 훌륭한 인간적 면모를 지닌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10대때부터 과학실험에 빠져든 피에르 퀴리는 20대 중반에 형 자크와 함께 압전성을 이용한 각종 계측기를 발명하고 대칭성, 결정 성장과 감쇠 운동에 대한 연구, 진동이 없는 저울 발명 등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36세때 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와 결혼한 그는 계단과 실험실 사이 비좁은 통로에서 아내와 함께 연구를 시작,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한 공로로 1903년 앙리 베크렐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1906년 파리에서 짐마차에 부딪히는 불의의 사고로 47세의 생을 마감한다.
퀴리 부인이 주위 인물들의 증언을 종합해 되살린 피에르 퀴리는 오로지 과학 연구에 매달릴 뿐 그에 따르는 명성을 거북해하고 궁핍한 생활에 시달리면서도 과학 연구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돈을 원할 뿐, 소박한 생활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자연 속에서 산책하기를 즐기는 사색가면서 두 딸에게도 자상한 아버지였으며 신중하고 수줍어하는 성격이어서 많은 친구들을 두진 않았으나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친절과 배려를 아끼지 않아 모두 그를 사랑했다. 다른 학자가 자신의 연구보다 먼저 성과를 나타내도 기뻐하였고 연구 결과로 특허를 챙겨 돈을 벌지 않고 그 결과를 공개하거나 기업에 제공하였다.
짧지만 훌륭했던 그의 삶은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퀴리 부인은 물론 큰 딸 이렌느도 남편과 함께 노벨 화학상을 받음으로써 그의 가족들은 프랑스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강한 정신과 맑은 영혼을 지닌 한 인간이 세상의 미래를 밝히는 역할을 제시하면서 부부의 애틋한 사랑을 전하고 있다.
김지석기자 jiseo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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