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회 집중… 너도나도 서울로

유례없는 성적 인플레를 낳은 지난번 대입수능시험 이후 대구시내 각 고교 진학담당 교사마다 한바탕 골머리를 앓았다. 예상 이상으로 나온 성적 때문에 학부모들의 기대가 쏟아졌기 때문. "우리 애가 380점을 넘었다는데 서울대에 갈 수 있을까요?" "360점 정도면 서강대나 한양대는 무난하겠지요?좭 하는 식이었다. 평소 모의고사보다 10~30점씩 오르니 모두들 서울로 갈 꿈을 꾸었다. 하지만 수험생의 절반 이상이 점수가 올랐던 시험이었으니 학부모들의 기대는 곧 실망으로 가라앉았다. ㄱ고 연구부장은 "평소에 경북대나 영남대 정도를 생각하던 학부모들도 점수가 좀 오르니 너나 없이 수도권 대학을 물어왔다"면서 "성적 발표 후 낙담하던 표정이 참으로 딱해 보였다"고 말했다.

재수생 학원에 가 보면 학급 편성이 재미있다. 대개 3분의 1은 서울대반, 3분의 1은 연·고대반, 3분의 1은 경북대반이다. 목표를 높여잡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지만, '서울 소재 대학' 이름을 내거는 것은 대학에 떨어지고 갈피를 못잡는 학생과 학부모들을 끌어들이기에는 더없이 좋은 상술이다. 대구 모 학원의 경우 서울대 10개 반 가운데 실제 서울대에 갈만한 수준은 2개반 정도이고 나머지는 연·고대도 쉽지 않다. 연·고대반은 실제 경북대 정도 수준이다.

이같은 서울 선호는 고교 졸업 후부터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교육부에 따르면 매년 수능성적 상위 5% 학생 가운데 인문계의 65~70%, 자연계의 55~60%가 서울 소재 대학으로 진학한다. 99학년도의 경우 각각 68.6%, 57.3%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다.

수능시험이 쉽게 출제된 3년 전부터 경북대를 비롯한 지역 대학들은 1학년 휴학생이 너무 많아 학사운영에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재수를 해서라도 서울로 가려는 학생들 때문이다.

대학 3, 4학년이나 졸업 후에는 수도권 대학 편입 현상으로 이어진다. 98년 2학기 3천660명이던 지방대 출신 수도권대 편입자는 99년 1학기 전체 편입생의 62.5%인 5천465명으로 급증했다. 어떻게 해서든 수도권 대학 졸업장을 받고 싶어하는 학생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방증이다.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라'는 옛말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할 뿐 아니라 모든 기회가 수도권으로 더욱 집중하는 오늘날 더 절실한 상황인 것이다.

교육에 있어서 인재 유출은 곧 교육비의 유출로 이어진다. 수도권 대학에 자녀를 진학시킨 가정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아낀 돈을 자녀 교육에 들이는 만큼 지방은 돈이 마르고 수도권은 돈이 몰리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지방 산업의 쇠퇴와 경제난의 주요한 원인이다.

대학 졸업 후 취업에서도 인재 유출은 그대로다. 지방대에서 그나마 공들여 키운 인재들은 속속 서울로 향한다. 서울로 가지 못한 졸업생들도 눈은 항상 서울을 향해 있다.

취업 교육에서 놀랄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정보통신교육원 대구분원. 지난 9일 선발한 '프로젝트 실무과정' 교육생 모집에는 3대1이 넘는 지원자가 몰렸다. 6개월 동안 밤낮 없이 교육을 받아 수료증을 쥐게 되면 취업은 떼논 당상. 지난해 상반기까지 취업률 100%를 자랑했지만 하반기 이후 경기 위축 영향으로 90%대로 떨어졌지만 실제 하락 원인은 수료생들의 눈높이 때문이다.

오재부 분원장은 "수료생 대부분이 서울 업체 취업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지역 업체의 구인 요청도 적지 않고 보수나 사원 복지 등 여러 면에서 서울 업체보다나은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이 서울 업체에 취업하는 수준은 대개 연봉 1천600만원 안팎. 이달 초 지역 한 업체가 2천만원선을 제시했지만 선뜻 희망하는 수료생이 없었다. 서울의 물가 수준을 감안하면 연간 1천만원 가까이 차이가 나지만 이들은 한사코 서울을 고집한다. 대구 업체는

장래성이 적다는 이유 때문이다. 대구에서는 관련 업체가 많지 않고 금융, 정보 등 여러 면에서 불리하기 때문에 성공 가능성도 그만큼 낮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이렇다 보니 지방 기업들은 아무리 유능한 인재를 뽑으려 해도 뽑을 길이 없다. 지난 연말 경북대 구인 게시판에는 지역 모 업체 인사담당자가 구인 공고와 함께 "제발 원서라도 좀 내 주세요"라는 하소연까지 올려 얘깃거리가 됐다. 많은 학생들이 안타까움을 느꼈지만 정작 그 업체에 원서를 냈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결국 지방 기업들은 안팎의 차별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밖으로는 수도권 중심의 산업 정책, 돈의 집중 등에 시달려야 하고, 안으로는 인재 고갈로 인한 경쟁력 약화에 허덕이는 것이다.

중소기업을 하는 신모(56)씨는 "기업의 장래를 위해서는 사람을 키워야 하지만 지방에서는 적당한 선에서 포기하는게 현명하다"며 씁쓸해했다. 전문성을 높이려 학원에보내고 대학원도 시켜 주며 투자를 아끼지 않지만, 좀 쓸만 해지면 떠나버린다는거였다. "지난 연말에도 네트웍 업무를 맡던 직원이 갑자기 사표를 내, 알고 보니 서울로 갔더군요. 어려운 회사 형편에 일본 연수까지 보내줬는데…"

그나마 공직은 지방대 출신들에게 취업의 숨통을 틔워주는 몇 안 되는 숨구멍이다. 대구시청 5급 이상 행정·기술직 공무원 가운데 수도권 대학 출신은 31명에 불과한 반면, 지방대 출신은 187명에 이른다. 수도권대 출신들이 지방공무원을 꺼린다는 역설도 되지만, 지방대 출신들의 수도권 유출을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어느 정도 하고 있는 셈이다.

수도권 대학 졸업자들이 고향을 찾아 U턴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도 공직사회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 서울대 출신인 최삼룡 대구시 국제협력과장은 "행정고시 합격자의 90%이상이 수도권 대학 출신인 점을 감안하면 지방대 출신에게는 공직도 좁은 문"이라며 "지방에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인재 유출을 막는 최대 전제조건"이라고 말했다.

박찬석 경북대 총장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이 주장하는 '인재지역할당제' 역시 이같은 실정과 맥을 같이 한다. 국가의 주요 시험을 인구 비례로 지방대학에 할당하면 지역 인재와 교육비 유출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현하기에는 간단치 않지만 인재 유출을 막을 마땅한 대안이 없는 현실에서는 그나마 설득력 있는 대안이다.

학력이나 출신 대학 중심의 사회구조를 깨는 것도 시급한 일이다. 홍덕률 대구대 교수는 "뿌리깊은 한국 사회의 학벌주의가 인재의 서울 집중을 부르는 주요 요인"이라며 "인재 유출 문제는 학벌이 인생을 좌우하는 한국사회의 관행 척결과 함께장기적으로 해결해나가야 할 어려운 과제"라고 지적했다.

김재경기자 kj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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