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이 코앞에 다가왔다. 맏며느리인 내 마음은 벌써부터 바빠서 숨이 자꾸만 가빠진다. 머리 속에는 차례상에 올릴 음식들이 오락가락 한다. 작년엔 장을 늦게 보았더니 떡국 국물 낼 사골 뼈가 동이 났었다. 그래서 사태 살로 떡국 국물을 내고 속으로 여간 송구스럽지 않았었다. 그래서 엊그제 원고를 쓰다가 머리도 식힐 겸해서 버스를 타고 농협공판장에 갔다. 설 장을 보려는 사람들로 그 넓은 매장이 들썩거렸다. 우선 정육부에 가서 사골 뼈부터 샀다. 탕국에 쓸 양지, 통째 삶을 돼지고기, 전을 부칠 다짐육을 가방에 넣었다. 산적 대신 갈비를 쓰면 좋겠는데 비싸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갈비는 피해가기로 하고 계란을 보태 일차 장보기를 끝냈다. 집으로 돌아오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차례상에 올릴 생선은 벌써 준비해서 채반에 말리고 있으니 중요한 장보기는 끝낸 셈이었다.
그런데 설 명절이 돌아온다고 바쁜 사람은 우리집에서 나 혼자다. 남편은 직장일로 바쁘고 대학생인 아이들도 나름대로 바쁘다. 나도 소설가이니 남못잖게 바쁜 사람이다. 아무도 설명절에 대해 나만큼 신경 쓰지 않는다. 물론 아이들은 전을 부칠 때 도와야 한다고 마음의 준비들은 한다. 늘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아마 남편은 연휴에 대해 신경 쓸 것이다. 물론 바쁜 아내가 설 준비한다고 수고가 많을 것이란 생각은 할 것이다. 명절 쇠고 나면 얼굴이 퉁퉁 붓거나 등허리가 결린다고 여기 밟아라 저기 두들겨라 하니까.
내가 어릴 때 어머니도 맏며느리였다. 설밑이 되면 작은어머니가 오셔서 추운 섣달 어느 날 양지쪽에 가마니 깔고 제기(祭器)를 닦았다. 그 다음엔 며칠 걸려 과줄을 만든다. 술을 담글 땐 아이들도 기쁘다. 모처럼 하얀 쌀로 찐 술밥을 주먹으로 쥐어 나르며 입이 미어지게 먹을 수 있으니까. 두부를 만들고 감주를 담고 떡 쌀을 담그면 내일 모레가 설날이었다. 물론 추수 끝난 뒤 메주 쑤고 나서 엿을 고아 조청을 따로 장만해서 과줄에 바르니 그때부터 설 장만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앞에도 있었다. 찰떡과 차조떡에 넣을 취를 봄에 말려두었으니 이미 설날은 일년내내 준비되어 온 셈이었다. 하여튼 거기다 큰집 작은 집 열도 넘는 아이들은 저마다 가슴이 부풀게 기다렸다. 대목 장날에 저마다 설빔으로 옷 한 벌 씩 얻어 입는 것에서부터 과줄 굽는 냄새가 온 마을을 진동하면 그런 거 못하는 집 아이들에 견주어 어깨가 으쓱해서 모양이 비틀린 과줄 얻어들고 다니며 입이 번들거리게 먹었다. 떡 방앗간은 새벽부터 앞이 안보이게 줄을 섰고 집에서는 떡 메 치는 소리가 당당했다. 개피떡을 뜨면 아이들이 등뒤에 서 있다가 다람쥐처럼 들고 달아나고 머지않아 떡 사발을 들고 이집저집 돌리는 심부름은 내 차지였다. 아버지는 윷을 깎고 토정비결을 보고 세뱃돈을 준비했다. 온 가족 일가친척 마을 사람들 전부가 설명절을 기다리고 준비하고 맞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이들도 설을 기다리지 않는다. 아이들에겐 세뱃돈, 어른들에겐 연휴가 특별할까? 마음과 몸이 고단한 사람들은 음식을 만드는 여자들뿐이다. 설이 민족의 축제가 아니라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전통과 여자들의 노동뿐이라면 당연히 불만이 생기게 마련이다.
농경문화의 하나인 설명절을 이 시대의 성격에 맞는 축제로 다시 짤 수는 없을까? 누구나 기다리고 모두 즐거운 명절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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