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미룰 수 없는 과제…전국적 동참이 관건

청와대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한 인사는 김대중 대통령한테 두번 놀랐다고 한다. 한번은 임명장을 주는 자리서의 일성(一聲)이 다름아닌 지방분권화에 대한 연구 주문이라는데 놀랐고, 또 한번은 그 뒤 지방분권에 대한 갖가지 보고를 해도 전혀 실행에 옮기지 않아 놀랐다는 것. 그는 "대통령이 분권화를 언급하자 모 수석이 화들짝 놀라 분권 연구는 곤란하다고 건의했으나 대통령은 분권화가 중요하니 그렇게 하라고 지시했다"고 술회했다. 대통령은 분권화에 대한 의지가 확고하나 정부 관료들이 이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확인케하는 대목이다.

지방분권 관련 정책연구 때문에 청와대와 행자부 고위관리를 자주 만난 한 교수도 묘한 경험을 했다. 공식 자리에서 지방분권의 필요성과 방향까지 세세히 언급하던 관료들이 사석으로 옮기자 입장을 싹바꿨다. 언제 분권을 언급했느냐는 듯이 지방정부에 대한 노골적인 불신을 드러내고 중앙 집권의 효율성에 대해 목청을 돋웠다.

"행자부가 지방의원 수를 줄이고 기초단체장 임명제를 추진하려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지자체장은 선심성 행정으로 예산을 낭비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단체장을 잡아야 나라가 잘 된다는 것이 그들의 근본 인식이거든요. 도(道)를 없애려는 시도 또한 암암리에 하고 있어요"

이들 두 인사의 주장은 하나. 지방 분권이 이뤄지려면 지방에 터전을 잡고 있는 지역민들이 나서야 이뤄질 수 있다는 것. 중앙의 정치인이나 관료가 주도하는 분권은 흉내만 내다 그치거나 일그러진 모습을 띠는 것이 필연적이라 전망한다.

현재 정부의 움직임은 일단은 고무적이다. 국무총리실에서 지역균형발전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고 중앙기관의 지방이전을 의무화한다는 소식이다. 지방분권이란 세계적 물결을 우리도 타고 있는 셈.

이런 중요한 시점에 지방의 목소리는 아직 미약하다. 지방분권의 시대에 지역민들이 소외되는 아이러니가 생겨날 가능성도 적잖다. 지자체, 지방의회, 시민단체가 나름의 시도는 하고 있다. 하지만 구심점이 없어 폭발력이 적다.

지방의 반란을 위한 지역의 단결이 최대 과제의 하나다. 경북대 경영학부 서정해 교수는 "외국과 중앙, 지방의 움직임으로 볼 때 지방분권 운동은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지역의 과제"라면서 "지역의 학계, 언론계, 지자체, 시민단체, 상공계, 정치권 등 각계가 지방분권을 위해 대안을 제시하며 통합된 노력을 할 때"라고 지적했다.

분권의 이론을 제공하는 것은 학계의 몫. 분권에 대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중앙에 압박을 가하는 것은 언론과 정치권이 할 일 이다. 또 대구시와 경북도 등 지자체는 중앙의 어떤 권한을 이양받아야하는지에 대해 전문집단답게 적극 자문에 나서야 한다. 지방분권은 종국적으로 시민운동으로 이룩할 수밖에 없어 시민사회단체의 역할은 더욱 크다.

넘어야 할 산은 또 있다. 대구의 고질적인, 서로 앞서 나가려는 '일등주의 병'. 타기관이 아무리 좋은 사업을 벌여도 자신이 주도하지 못했을 때는 외면해 버리기 일쑤다. 이 때문에 위천단지, 삼성차, 지하철 부채 등 힘을 모아야 하는 큼직 큼직한 현안에 대해서 대구에서 단 한번도 같은 목소리가 나온 적이 없다. 대구상의 박의병 기획조사부장은 "지방분권 운동도 특정 기관·단체가 주도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면서 "이번만은 주도적 기관·단체가 아니더라도 한마음으로 동참해 대구의 통합을 이루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지방분권 운동의 탄력을 얻기 위해 각계가 참여하는 협의체 구성은 필수적이다. 부산, 광주, 전주, 대전, 강원과 연계해 분권운동을 벌이고 있는 대구사회연구소는 대구의 단결을 위해 각계가 참여하는 가칭 '대구분권운동 100인 위원회' 구성을 제안할 계획이다.

분권운동이 본격화하면 참여할 기관 단체는 많다. 문희갑 대구시장은 최근 분권운동을 펴고 있는 한 단체와의 간담회에서 "대안 있는 분권운동일 경우 대구시도 동참해 역할을 맡겠다"고 밝혔다.

문 시장의 언급대로 분권운동은 분명 대안을 갖고 있다. 전국 기초단체장협의회는 분권을 위해서는 법제화가 시급하다고 보고 지방분권법 시안 마련을 위해 학계에 용역을 의뢰한 상태다. 대구시, 경북도 등 8개 시도도 △분권적 분산체제 구축을 위한 제도 개혁 △분권 실현 중단기 정책 프로그램 연구를 위해 용역을 의뢰할 계획이다. 부산시는 이미 △국토균형발전법 제정 △중앙 기관의 지방 이전 등 8개항을 주요 내용으로 한 지방균형발전안을 마련해 건의, 중앙 기관의 지방이전의 경우 최근 건교부의 주요정책으로 채택됐다.

지방분권의 성공적 추진은 어느 한 지역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대구와 부산, 광주 대전 전주 강원 등 지역간 연대가 주요한 동력이다.

지난해부터 부산의 분권 운동을 관심있게 취재해온 국제신문 박상현차장은 "특정 단체, 특정 지역의 힘만으로 분권의 성과를 얻어내는 게 얼마나 힘든지 절감한다"면서 "지역간 연대가 이뤄질 때 지방분권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도도한 흐름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이중호 교수는 "중앙집권, 수도권 집중이 지방 피폐의 원인이란 공통 인식을 갖고 있는 만큼 연대의 길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면서 "연대가 공고하면 지방분권 실현도 그만큼 빨라질 것"이라고 했다. 체계화, 구체화한 수준은 아니지만 최근들어 지방분권과 자치를 위한 전국 연대의 모색 작업이 활발해진 것도 두드러진 변화다. 참여연대는 자치의 확대를 목표로 전국 시민단체가 단결하자고 촉구, 대구에서는 3월부터 시민단체간 워크숍을 거쳐 △시민단체 연대기구 구성 △주민소환 및 주민투표제 입법화에 힘을 모을 계획이다. 경실련도 지난해 11월 '분권과 자치를 위한 전국 시민행동' 기구를 발족, 지방자치법 개정 청원 운동을 벌이고 있다.

또 한국사회학회도 지방분권을 주요 의제로 설정했으며 4월에는 (가칭)전국자치연대가 출범하고, 법정기구가 된 기초단체장협의회, 기초의원협의회, 광역의원협의회도 활동 보폭을 넓히고 있다.

대구참여연대 권혁장 정책부장은 "지역의 각 단체간, 타 지역간 분권운동의 주체 세력들이 일상적 상설적으로 연대활동을 벌이고 나아가 연대기구를 만들어 체계화하면 지방분권은 실현될 것"이라고 했다.

한 지역의 창조적 소수가 주민들과 함께 호흡하고 타 지역의 창조적 소수와 보조를 맞춰 지방분권 운동의 수위를 높여갈 때 진정한 '지방의 시대'는 열린다. 그때 "장마전선이 (수도권을 벗어나 중남부 지방으로) 남하해 참 다행입니다"는 기상캐스터의 수도권 중심 사고도 사라질 수 있다.

최재왕기자 jwchoi@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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