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남은 것은 세계 기록 경신과 세계 육상선수권대회(8월)에서의 승리다. 결승선을 불과 2㎞ 남겨놓고 지난 2월 타계한 아버지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고 라스트 스퍼트를 시작한 이봉주는 결승 테이프를 끊는 순간 잠시 쏟구치는 감정을 애써 감추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보스턴 하늘에 반세기만에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순간이었다.
막판 무서운 스피드로 3파전을 독주로 바꾼 이봉주는 악착같이 따라붙던 게자헹 아베라(에티오피아)와 엘리야 라가트(케냐)를 멀찌감치 따돌렸음을 확인하고는 여유있게 1위로 골인했다.
작전과 자신감의 승리였다. 레이스 초반부터 대체로 평탄한 30㎞ 지점까지 무리하지 않고 10여명의 선두그룹에 끼여 안정적인 레이스를 펼친 이봉주는 굴곡이 심한 30㎞ 지점에서부터 서서히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난코스가 이어지는 '심장파열 언덕'(하트브레이크 힐)'인 32㎞지점에서부터 페이스를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며 상대 선수들의 진을 빼기 시작했다.
37㎞ 지점. 99년 보스턴마라톤에서 2위를 한 구에라의 끈질긴 추격을 뿌리치고 40㎞ 지점에서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70년 충남 천안에서 농사를 짓는 이해구씨와 공옥희씨(66)의 2남2녀중 막내로 태어난 이봉주는 천안 광천고교 1학년때 육상 장거리에 입문했다. 91년 한국 마라톤의 대부 정봉수 감독의 끈질긴 권유로 '코오롱 사단'에 입단한 이봉주는 이듬해 1월 도쿄국제하프마라톤대회에서 한국최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92년 자신의 첫 풀코스인 올림픽대표선발전에 출전했지만 레이스 도중 넘어져 올림픽행이 좌절됐고 92년 대구전국체전에서도 2시간20분대로 9위에 처지는 시련이 거듭됐다.
그러나 이에 낙담하지 않은 이봉주는 93년 10월 광주전국체전에서 2시간10분27의 호기록으로 정상에 올랐고 그해 12월 호놀룰루마라톤에서 우승, 황영조가 은퇴한 한국 마라톤의 차세대 주자로 우뚝 섰다.
"잘 뛰게 된 것은 타고난 게 아니라 노력했기 때문"이라는 자신의 말대로 이봉주는 세계 정상의 마라토너를 향해 자신을 더욱 몰아 붙였고 94년 보스턴마라톤에서 마침내 10분벽을 돌파(2시간9분59초)했다.
국내외 대회에서 꾸준한 성적을 내오며 가능성을 보이던 이봉주는 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은메달을 차지하며 명실상부한 한국마라톤의 간판스타로 자리잡았다.
98년 로테르담마라톤에서 2시간7분44초의 한국최고기록으로 준우승을 차지한 이봉주는 하지만 99년 런던마라톤대회에서 2시간12분대의 저조한 기록으로 12위에 머문 뒤 소속팀인 코오롱과의 갈등으로 한동안 방황하며 선수생활의 최대 위기를 맞았다.
어느덧 30줄에 들어선 이봉주는 시드니올림픽 이후 2개월만에 후쿠오카마라톤에서 준우승(2시간9분4초)하며 다시 일어서는 불굴의 투지를 보였다.
수많은 좌절과 역경을 헤쳐온 '봉달이' 이봉주가 한국에 세계선수권 첫 금메달을 안겨주며 세계 정상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를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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