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운동에 뛰어들었던 농사꾼과 오랜 검사생활을 해온 헌법재판관과 가톨릭 사제였던 스님의 시집이 한꺼번에 나왔다. 이 봄날, 우연의 일치일까. 시가 추구하는 것들도 결국은 하나이다. 시란게 원래 그렇듯, 모두가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고 있다. 각자의 선 자리와 보는 눈이 조금씩 다르다면 다를까.
농사꾼 시인이 근육질의 삶에서 묻어나는 농민의 슬픔과 분노의 근원을 노래하고자 했다면, 검사 시인은 고독·불안·범죄·질병·죽음 등 인간의 비극적인 한계상황을 넘어서기 위한 통로를 터보려고 애쓰고 있다. 사제였던 승려 시인은 삶에 대한 불교적 성찰에 침잠하면서도 세간에 대한 육두문자도 서슴지 않는다.
이중기(44) 시인은 영천 금호강가에서 과일농사를 짓고 있다. 그래서인가 고재종 시인의 표현대로 그의 눈은 순하고도 울멍울멍한 소의 눈망울을 닮았다. 그러나 좌절과 고통 속에 힘든 농사와 시의 외로움을 끝내 버티며 생의 의미를 추스러오느라 생긴 순결한 분노가 담겼다.
이땅을 식민지로 규정하며 피 튀기는 울분으로 가득 채웠던 1992년 첫시집 '식민지 농민'과 싱싱한 서정의 밀밭을 꿈꿨던 두번째 시집 '숨어서 피는 꽃'을 통해 분노와 서정의 미학을 반추하던 시인은 이번 '밥상 위의 안부'(창작과비평사)에서는 더욱 깊은 외로움과 사유를 드러내고 있다.
오늘날 참혹한 농촌현실 그대로 빚잔치와 죽음과 절망의 음울하고 격한 시편들이 많지만 깊은 사유의 문장에다 민중의 숨결을 담은 적절한 방언구사 그리고 사라진 우리말을 되살리면서 결코 품격을 잃지 않고 있다. 육담과 방사와 은근짜로 걸쭉하게 엮은 성(性)풍자에서는 역설적으로 푸른 힘을 내비치기도 한다. 다만 생산이 없는 늙은 농촌의 성이어서 공허하기는 하지만….
지난해 대구고검장으로 있다가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자리를 옮긴 송인준(57) 시인은 26년간 경향 각지에서 검사생활을 해 온 법조인이다.
두번째 시집 '겨울숲 봄빛통로'(이화)에서 시인은 오늘 우리들이 선 자리를 바람 성성하고 밤 깊은 겨울숲이라고 단정하면서도 그 황량한 곳에서 숨죽이며 태동하는 르네상스를 투시하고 있다. 언손을 부비며 봄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해맑은 아이처럼.
시집 1·2부에서는 인간의 존재와 생존의 비극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3부 '봄빛통로'에서는 인간의 비극적 한계 극복을 위한 통로로 고향과 깨워야 할 사랑을 제시하고 있다.
가톨릭 사제로 사목을 하다 승려가 된 각원(覺圓)은 낙동강가 허름한 집에 불상을 모시고 가파른 구도의 길을 걷고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종교철학까지 공부했지만 그는 실천적 대승불교를 추구하는 속인이기도 하며 고뇌하는 지식인에 가깝다.각원의 두번째 시집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만인사)은 시집 제목에 대한 그의 시적 응답이다. 불교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철학적 성찰과 삶의 진정성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지만, 세간을 향한 풍자와 야유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괜한 빈정거림이 아니다. 잠든 서민의식을 내리치는 구도의 죽비요 잘못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한 가엾은 연민이다.
조향래기자 swordj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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