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시론-신뢰의 위기

1960년대 이후 우리 사회는 본격적으로 산업화를 추진해 왔다. 당시 우리 경제의 가장 큰 고민은 인프라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양질의 저임금 노동력은 풍부했지만, 도로, 철도, 항만 등의 경제 인프라와 전기, 철강 등의 기간산업이 부재한 것은 경제건설의 가장 큰 장애였다. 정부는 1970년대부터 인프라 확충에 주력하였다. 고속도로와 항만을 건설하고 철강, 정유, 전기전자, 자동차 등 기간산업을 일으켰다. 그것은 그 뒤 빠른 경제성장의 지렛대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의 귀결점은 어이 없게도 IMF였다.

도로와 항만과 철도만을 경제의 기초라고 생각한 것은 너무도 어이 없는 단견이었다. 경제를 경제로만 본 것이 문제였다. 경제를 작동하게 하는 경제외적 조건을 당시 정부는 간과했던 것이다. 경제가 안정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경제외적 인프라와 사회적 조건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당시 정부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경제의 사회적 인프라 가운데 가장 중요한건 역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이며, 제도와 룰에 대한 구성원의 신뢰이다. 신뢰가 무너진 사회에서는 자본주의도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아무리 도로와 항만시설이 훌륭하고 기간산업이 갖추어져 있어도, 신뢰가 무너진 사회에서는 경제가 될 리 없는 것이다. 거짓과 사기와 부정이 판치는 세상에서는 제 아무리 튼튼한 경제 인프라도 사상누각에 불과한 것이다.

불투명한 기업 회계와 부정한 은행 경영이 IMF의 원인이었다는 것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높아진 임금과 그로 인한 전통산업의 국제경쟁력 추락이 IMF 사태의 원인이란 것은 크게 잘못된 진단이다. 부도난 대우그룹과 회생중이던 나라경제를 다시 멍들게 한 현대건설에서 드러난 천문학적 규모의 거짓 회계도, 실은 빙산의 일각이요 우리의 기업 풍토에서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닌 것이다.

얼마 전 이코노미스트지에는 부끄러운 기사가 하나 실렸다. 세계적인 회계 및 컨설팅회사가 세계 주요 35개 국가의 투명성을 조사해 발표한 자료였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불투명성 지수가 여전히 세계 5위로 나타난 것이다. 회계 및 기업지배구조 부문의 불투명도는 세계 1위로 조사되었다. IMF 이후 3년 넘게 추진해온 재벌 개혁과 기업 지배구조 개혁이 실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얘기다.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굴지의 대우그룹이 부도나고 현대그룹이 휘청거리는 것보다 더 걱정되는 대목이다.

신뢰가 무너진 곳에서는 경제가 일어설 수 없다. 실은 경제뿐만이 아니라 정치도 교육도 가정도 신뢰 없이는 바로 설 수 없다. 특히 신뢰와 투명성이 안정과 발전의 첫째 조건이 될 세계화시대, 정보화시대에서는 더욱 그렇다.

고속철을 짓고 공항을 건설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외국자본을 들여오고 구조조정하는 것이 근본적인 위기 타개책일 수는 없다. 그보다는 우리 사회의 무너진 신뢰를 일으켜 세우고 투명성을 높여 가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기업인과 금융인은 투명한 경영을, 정치인은 말의 신뢰와 정직을, 정부는 공정하면서도 투명한 법 집행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 IMF가 그나마 우리에게 준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그런 교훈이다. 비극적인 IMF를 맞고서도 그것 하나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희망이 없는 민족이다. 저 높은 정치권과 재벌들 세계가 여전히 거짓과 불신으로 가득한 것을 보면서, 불안과 우울증에 빠지는 것은 나 뿐일까?

홍덕률 대구대 교수 사회학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