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先頭 기러기는 떠나가고

가을 북녘하늘을 유유히 나는 기러기군(群)의 모습은 한없는 정감을 자아낸다. 선두 기러기를 정점으로 조화로운 V자형 대열로 이동하는 이들의 행진은 그저 평화롭기만 하다. 그런데 이 평화롭기 그지없는 기러기들의 비상(飛翔)이 오늘날 한국사회가 처한 현실인식에 개안(開眼)이 되고 더불어 미래의 좌표를 설정해주고 있음은 웬일일까.

일본의 경제학자 아키마스는 1930년대 말 기러기떼를 보고 유명한 기러기형(Flying Geese) 경제성장이론을 제시했다. 기러기는 무리중 가장 힘센 놈이 선두에 서는데 선두 기러기의 힘찬 날갯짓이 순간 순간 위로 상승하는 바람을 일으켜 뒤따르는 동료 기러기들은 그 바람결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항해한다는 사실에 착안한 것이다. 이 모델은 후진국의 경제발전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마치 선두 기러기의 도움을 받아 기러기떼가 날 듯 선진 산업국이 있으면 그 주변 후진국들은 선진국의 도움으로 자연스레 발전한다는 주장이다. 당시 일본 경제의 자만심을 드러낸 이론이었다.

이후 일본 경제학자들은 이 모델을 계속 확대 발전시켜 동아시아 경제를 설명하는 결정적인 도구로 사용하게 된다. 즉 대장 기러기인 일본이 앞장서 날면 그 뒤를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신흥공업국(NICs)·동남아 국가 순으로 따르고 마지막으로 중국, 베트남이 차례로 날아오르면서 각국간 투자와 무역이 활발해져 시너지 효과가 발생, 급속한 성장과 산업구조 고도화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 모델은 설명의 간결성으로 인해 나름대로 인정을 받아왔다.

그런데 바로 지난주 이 기러기 모델이 다시 언론에 등장한 것이다. 일본이 2001년 통상백서를 통해 "이제 일본이 경제를 견인하는 기러기형 발전의 시대는 끝났다"고 공식 선언한 것이다. 일본이 마치 자기 경제의 우월성을 찬양이라도 하듯 만들어 낸 기러기 이론을 70년이 지난 오늘날 일본 스스로 이를 용도폐기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선두 기러기가 계속 선두에 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상백서는 그 이유까지 설명하고 있다. "중국 경제가 급부상, 일본의 독무대인 첨단 산업분야에서 급속히 경쟁력을 갖춰 이제 아시아는 '대경쟁 시대'로 돌입했다"고.

일본이 선두 기러기를 포기한 것은 바로 중국 때문이다. 이는 동아시아가 일극(一極)체제에서 다극체제로 바뀌고 있음을 의미한다. 바야흐로 동아시아에 지각변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선두인 일본을 바짝 뒤쫓아가던 한국 기러기는 어떻게 되는가. 선두가 바뀌었으니 낯선 선두 기러기를 한없이 따라가란 말인가. 아니면 선두가 둘이 됐으니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한단 말인가.

지난 3월 비즈니스 위크지(誌) 도쿄 국장인 브라이언 브렘느는 기러기 이론을 언급하면서 강력한 경고성 메시지를 남겼다. "비록 선두 기러기라 할지라도 죽음의 회오리 바람을 만나면 동료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삶을 찾아 제 갈길로 가버릴 것이다. 뒤따르던 힘없는 기러기들은 우왕좌왕하다 그대로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고 일갈했다. 브렘느의 경고대로 두달후 일본은 선두 기러기 자리를 포기하고 '잃어버린 10년'을 찾기위해 몸부리치고 있다. 중국은 선두를 차지하려고 용틀임하고 있다. 샌드위치 한국은 무엇을 하고있는가.

무한경쟁 글로벌시대는 '2위'를 허용하지 않는다. 미국과 일본을 보라. 그들이 신국수주의. 신패권주의라는 국제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자국 이기주의에 빠져있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 동아시아에 다극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다극시대에는 각 극의 선두만이 생존할 것이다. 그래서 너나할 것없이 계층마다 기득권 싸움이나 일삼고 상호불신의 늪에서 급기야 좌우익 논쟁까지 벌이고 있는 오늘날 우리사회의 앞날은 더욱 암울하기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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