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歷史)는 순교자를 원한다'는 말은 그 시대의 의인(義人)에 대한 기대다. 불의에 항거하거나 잘못된 사회현상 등을 질책하는 '올곧은 사람'은 언제나 힘을 가진 개인이나 집단에게는 제어의 대상이다. 조선조를 통해 봐도 그렇다. 사육신.생육신은 현재의 잣대로 보면 '통치권 찬탈'에 대한 항거로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조광조(趙光祖)는 개혁을 추진하다 역풍(逆風)을 맞은 ''참신한 선비'의 안타까운 꿈의 무산으로 우리들에게 각인돼 있다.
▲장준하(張俊河)의 평생은 독립운동, 독재항거 등으로 대표되는 삶이다. 지난 44년 학도병으로 끌려 갔다 탈출해 중국에 있던 광복군에 입교한 것은 어쩌면 불의에 굽히지 않았던 행동의 첫장을 연 것으로 보인다. 이때 조국 광복의 등불이 되고자 임시정부를 찾아간 6천리는 지금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되밟아보는 '장준하 구국장정 6천리'의 길이 될 정도다. 해방후에는 정의롭지 못한 권력에 투쟁의 불을 높이 든 민주투사로 유명한 생애는 75년 8월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마감한다.
▲그의 죽음을 두고 사망 당시부터 끊임없는 타살설이 제기되곤 했었다. 61년 5.16군사 쿠데타가 나자 '박정희대통령 불가론'을 주장했었고 무려 9차례에 걸친 구속과 석방을 반복할 정도로 박 정권에게는 '무서운 존재'였다. 박 정권에 의해 단순 '실족사(失足死)'로 처리된 그의 죽음이 타살로 결론 날 전망이다.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타살의혹을 과학적으로 조사하고 유일한 목격자를 소환해 당시 증언에 문제가 있었다는 시인을 받아 낸 것이 타살 결론에 도달한 바탕이 됐다고 한다. 최종 조사결과는 이달말 공식 발표할 예정으로 있어 장준하의 죽음의 진실이 26년만에 밝혀지게 된 것이다.
▲한국 현대사의 올곧은 지식의 표상인 그의 죽음의 배후가 관심의 초점이다. 그러나 이부분에 대한 진실은 가려내지 못하고 진행형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범인확인을 못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최초 목격자의 진술이 없어 확인이 어렵고 공효시효가 끝난 상태이기 때문에 '미궁에 빠져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단순 실족사가 아닌 타살로 결론난다면 '묻힐 뻔한 역사'는 언젠가 파헤쳐 진다는 뼈아픈 역사의 교훈을 얻게 된다.
최종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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