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벼랑끝에 선 쌀농사"젊은이들이 쌀 음식을 외면한다니 창고에는 쌀이 쌓여 가고… 그렇다고 쌀 농사를 포기할 수도 없잖습니까? 어째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칠곡의 대규모 쌀 농사꾼 김종기(52·기산면 영리)씨의 한숨은 깊었다.
김씨는 1979년 귀향, 물려받은 논 600평을 20여년 사이 6만6천평으로 늘렸다고 했다. 참외농사로 돈을 모은 뒤 모험을 결심, 정부지원금·융자금 등 6억원을 들여 기계화된 대규모 영농 체제를 갖췄다. 트랙터·콤바인 정도는 기본적인 것이고, 저온저장고·건조기에다 육묘공장까지 갖췄다. 그 외에 위탁 영농도 무려 12만평. 칠곡군청의 권혁중씨가 "전국 최고의 기업농"이라고 단정할 정도였다.
◈올가을도 '매상전쟁'예고
지금까지는 일단 성공. 매년 평균 2천700가마(40kg) 안팎의 벼를 거두게 됐고, 수입도 "1억원 정도 된다"며 김씨는 웃었다. 백우흠 기산면장은 "전국은 물론이고 올해로 3년째 동남아 농업인들까지 견학차 몰려 오고 있다"고 자기 일처럼 신나 했다.
그러나 그런 대농 김씨의 얼굴에서도 언뜻언뜻 그림자가 비치기 시작하는 듯했다. 사정이 달라졌다는 것. 작년 가을 거뒀던 벼 2천700가마 중 1천300가마를 매상하고 1천가마는 시중에 팔았으나 아직 400가마가 남았다고 했다. 안팔린다는 얘기였다. 사정이 이렇게 된 뒤 김씨도 이제 판매에까지 마음을 써야 하게 됐다.
소포장으로 팔아 볼까 하고 쌀 50가마를 찧었던 것이 바로 그제. 자신의 이름을 따 '금종쌀'이란 상표도 만들었다고 했다. "이도저도 안되면 헐값에라도 팔아야지 않겠습니까…". 말에 뒷심이 없어 보였다. 옆에서 듣던 백 면장이 올 가을엔 서로 많이 매상하겠다고 덤비는 매상 전쟁을 예언했다.
◈재고량 고스란히 농민 몫
김씨가 지금 부닥친 문제는 미곡 종합처리장들에서 더 심각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경북 도내의 34개 처리장(RPC) 대부분이 그때문에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 해마다 쌀 판매고가 200억원대에 이르러 전국 200개 농협 RPC 중 늘 상위권에 들었다는 상주농협 처리장의 이흥명(40) 장장도 "창고에 쌓인 쌀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1995년에 RPC사업을 시작했던 이 농협의 재고량은 일년 사이 1천t이나 늘어 지금은 5천400t에 달했다. 이때문에 작년 1만4천765t이던 수매량을 올해는 1만t 줄일 계획. 사정은 나머지 RPC들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이런 현실이 결국엔 농부들에게로 부담이 귀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86년부터 7년 넘게 UR협상을 지연시켰던 가장 큰 이슈 중 하나는 바로 쌀. 우여곡절 끝에 2004년까지 10년간은 시장 개방 유예로 귀착됐으나, 이제 어둠은 사방으로부터 다가오고 있다. 우리 식량안보의 최후 보루인 쌀 농업마저 벼랑 끝에 서게 된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5만1천t(1995년)에 불과하던 의무 수입량(최소 시장 접근 물량)이 곧 20만5천t(2004년)으로 증가할 뿐 아니라, 그 이후엔 시장을 완전히 열어야 하게 될지도 모를 상황이다.
대내적으로도 한계에 도달해, 쌀 소비 감소와 재고 누적이 사상 최대치를 해마다 경신하고 있다. 농림부에 따르면 WTO체제 때문에 정부 보조를 감축, 쌀 수매량은 1995년 137만5천t(955만 섬)에서 올해는 82만8천t(575만 섬)으로 줄게 됐다. 그러나 재고량은 그 사이 65만9천t(458만 섬)에서 무려 108만t(750만 섬, 작년)으로 증가했다.
농림부 측도 걱정이 많아, 식량정책과 이장의씨는 "생산량은 비슷한데 소비가 주니 재고가 늘 수밖에 없다"고 했고, 박병홍 서기관은 "앞으로 쌀 문제는 가장 큰 걱정거리"라고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전국의 논 면적도 1992년 130만ha에서 작년엔 114만9천ha로 줄었다. 하지만 쌀 농사가 수지 안맞게 됐다고 논에 다른 작목을 심는 사람이 증가한다면 그 파괴력은 손 쓸 도리가 없는 상황에 이를 것이 뻔하다고 관계자들은 불안해 했다.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은 "쌀 농사가 망하게 되면 우리 국가가 커다란 안전판을 하나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라고도 했다. 실업자를 흡수하고 연속 풍년까지 겹쳐 IMF사태의 위기를 넘길 수 있게 해 줬던 것이 바로 쌀 농사였다는 것이다.
◈전국민 쌀소비 운동나서야
쌀 농업의 위기를 국가라고 가만히 보고 있는 것만은 물론 아니다. 1996년 쌀산업발전 종합대책 마련, 6만 쌀 전업농 육성, 논농사 직불제 도입, 경북형 대규모 쌀 생산 체계 도입 등도 그런 몸부림의 하나들. 농협도 쌀 소비 촉진에 나서, 아침 밥 굶지 않기 운동, '쌀과 밥' 글짓기 대회 개최 등등을 잇따라 벌이고 있다. 농협중앙회 양곡부 조민선(34) 과장은 "세끼 밥먹기만으로도 농업 살리기에 한 몫 할 수 있다"며 도시인들의 호응에 애를 태웠다.
UR 타결 전후에 경북지역의 그 대책 수립을 책임졌던 당시 UR기획단 실무자 이태암(현재 도청 농정과장)씨는 "서구화된 우리 소비 행태와 입맛을 바꾸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권했다. 자신의 가족을 대상으로 한 그의 입맛 바꾸기 노력이 한 실례. 김치·된장 등 우리 음식을 꺼리는 중·고 1년생 두 아들을 얼러서 겨우겨우 큰 아들의 입맛은 50%, 작은 아들은 100% 가까이 전환하는데 성공했다는 것.
그러면서 이 과장은 'PL480 효과'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미국의 공법(PL) 480조에 따라 들어 온 원조 물자에 입맛이 길들여져 오늘날 그 사람들 음식을 더 선호하게 됐다는 것. 그 결과 작년의 우리 국민 1인당 연간 소비량은 쌀이 94.8kg인데 비해 밀이 무려 34.8kg으로 부쩍 증가했다. 고기 소비량(1인당)도 늘어 1988년에 소고기 4.8kg, 돼지고기 12.6kg이던 것이 1999년엔 8.4kg 및 16.1kg으로 늘었다.
덩달아 서구인들이나 많이 걸리던 암들이 우리 국민을 덮치고 있다. 이제 그 치료약까지 서양에서 사다 먹어야 할 판국이 된 것이다.
정인열기자 oxen@imaeil.com
장영화기자 yhja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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