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슈&르포-히로시마 원폭피해 56주년

꼭 56년 전 오늘이던 1945년 8월6일 오전 8시15분,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무서운 섬광 다음엔 온 세상이 잿더미. 일본도 패망했다.

하지만 징용 등으로 끌려 가 그곳에 살던 수많은 한국인들 또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1972년 실시된 기초 조사 때 신고한 사람은 전국에서 1만여명. 더 많은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피폭자 2세'라는 딱지가 붙는 것을 두려워해 신고조차 않았다. 방사능병은 대물림되기 때문. 그러는 사이 한많은 56년이 흘렀고, 일본은 지금 다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한국의 히로시마 합천=기초 조사 때 신고자의 절반은 합천 사람들이었다. 1만명 중 무려 5천77명이나 됐던 것. 그래서 합천은 지금도 '한국의 히로시마'라 불린다. 하지만 이제 남은 피해 1세대는 겨우 546명.

이들은 광복 이후에 계속된 무관심 때문에 또한번 힘든 세월을 통과해야 했다. 1972년에 '사단법인 원폭피해자 협회'가 창립되고서야 일본의 민간단체 등에서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일본 정부도 1989년에야 배상금도 아닌 위로금 형식으로 40억엔을 내놨었다.

1996년 10월에는 일본의 지원금으로 합천읍 영창리에 '대한적십자 합천 원폭피해자 복지회관'이 섰다. 가족조차 없이 가누기 힘든 몸을 끌고 구석구석 흩어져 살아야 했던 전국의 홀몸 피폭자 78명이 지금 이곳에서 여생을 함께 하고 있다.

피폭자들은 일본의 위로금으로 1인당 월 10만원의 생활보조금, 지정병원 무료 진료 등 지원을 받을 수 있었으나, 그 기금이나마 내년이면 바닥이 날 것으로 알려졌다.

◇어쩔 수 없는 한, 그리고 분노=합천 복지회관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김재식(87) 할머니는 "온 몸이 열에 녹아 지금껏 팔을 펴 보지 못했다"며, "흉한 모습을 감추려 한여름에도 긴옷만 입고 살아야 했다"고 했다. 할머니가 말한 죽기 전 소원은 일본이 망하는 것을 보는 것과 귀에서 비행기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는 것.할머니는 히로시마 잿더미에 4살 짜리 아들과 2살 나던 딸을 묻고 몸이 뒤틀려버린 남편과 둘이서 귀국했지만 남편조차 곧바로 자식들의 뒤를 이었다.

손순임(77) 할머니는 시부모·남편·아들을 몽땅 잃고 딸 하나만 치마 폭에 싸안고 돌아 왔다고 했다. 증오가 사무쳐 통증이 더 참기 어려웠다는 박모(83) 할아버지는 "아이들이 결혼할 때 피폭 집안임을 숨기려 이리저리 애써야 할 때가 가장 가슴 아팠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런 중에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가 불거지자, 5년 전부터 중풍으로 고생한다는 손귀자(72) 할머니는 "일본의 만행과 그날의 공포가 아직도 생생한데 우리들이 죽기도 전에 거짓말을 꾸며대려는 못된 심보"라며, "해협을 건너 가 일본 땅에서 피를 토하고 죽고 싶다"고 했다.

◇아픔을 함께 하는 사람들=일본 정부는 자국인들에겐 그 나라 원호법에 따라 월 3만3천엔씩 진료보조비까지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에겐 그림의 떡. 이 문제와 관련해 재일교포 곽기훈씨가 소송을 내 지난 6월 승소하기도 했지만 특별한 경우일 뿐이다.

정부들은 이렇게 어쨌든 모른 채 하려 애쓰지만, 합천의 복지회관엔 아픔을 함께 하려는 봉사자들이 적잖게 찾고 있다. 일본 민간단체에서도 쫓아 와 그나마 아픈 상처를 위로한다. 학생 봉사자들은 의손자·의손녀로 인연을 만들고 안마꾼과 말벗이 돼 드린다. 부녀 봉사자들은 목욕·빨래·청소를, 경찰관·군인들은 시설 돌보기, 풍물패들은 한바탕 춤판을 벌여 아픔을 쓰다 듬으려 애쓴다.

2년 전부터는 취미라도 붙이도록 그림 그리기, 질그릇 만들기, 종이접기 등이 지도되고 있다. 피폭자들도 그나마 위안이 되는 듯 이 일을 할 때만은 표정이 밝아진다. 배인조(65) 홍순덕(83) 할머니는 이렇게 닦은 실력으로 대구 운경재단의 '어르신 그림그리기 잔치'에서 연속 대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복지사 김광혜(43·여)씨는 "할머니들이 눈·입에서 피가 쏟아지는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죽음은 계속되고=기자가 취재 중이던 지난달 27일에도 또 한 할아버지가 한많은 세상을 뒤로 한채 숨을 거두고 있었다. 경기도 수원에서 와 있던 방훈제(79) 할아버지의 시신은 그 날 복지회관을 떠났다.

이렇게 한을 거둔 영혼들을 달래기 위해 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는 매년 8월6일 복지회관 위령각에서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이 위령각에는 718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올해도 오늘 오전 11시에 피해자 가족과 지역 기관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향이 살라졌다. 이 자리에는 양심적인 일본인들도 참석했으며, 일본의 민간 봉사단체인 '태양회'가 늘 위령제를 지원해 오고 있다.

합천·정광효기자 khjeo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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