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안동대 김희곤 교수'…백년만의 귀향'펴내

태백산 호랑이, 신출귀몰, 축지법의 도인 등 신화적 존재로 남아 있는 평민 의병장 신돌석(1878-1908). 그의 불꽃같은 생애를 철저한 현장조사와 고증을통해 복원해낸 국내 최초의 신돌석 평전이 선보였다.

안동대 사학과 김희곤 교수가 쓴 '신돌석;백년 만의 귀향'(푸른역사 펴냄). 신화적인 인물로 알려진 역사 속의 인물을 '역사화'하는 데 초점을맞춘 이 평전은 신화 속에서 왜곡된 인물의 역사성을 재조명하고 복원해낸 성과물이다.

현행 고교 국사교과서는 한말 의병장 신돌석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평민 출신의 의병장 신돌석은 의병을 모아 영해에 입성하여 관군의 무기를 탈취한 후 평해, 울진 등지에서 활동하였는데, 의병의 수는 한 때 3천명을 넘었다. 종래의 의병장은 대체로 유생들이었는데, 이 때부터는 평민 출신 의병장의 활동이 두드러져 의병운동의 새로운 양상을 보여 주었다."(97쪽)

한 인물에 대한 교과서의 기술치곤 적잖은 분량이다. 하지만 이번 평전에는 신돌석에 대해 새롭게 밝혀낸 내용들이 상당하다. 그의 고향 마을주막집 앞에서 거병, 당시 유림들이 주로 서원이나 향교에서 거병했던 것과 비교해볼 때 평민 의병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신돌석의 의진(義陣)에는양반과 참봉, 사족, 동몽 등의 인물들이 참가했으며 명문 거족들의 지원이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또 그의 활동시기는 1896년 을미의병 당시 수개월 간 활동하기도 했으나 1906년 4월부터 1908년 12월까지 대략 3년 정도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활동영역도 삼척 남부에서 경주 북쪽 동대산까지, 서쪽으로는 대체로 일월산에서 영양과 청송을 잇는 선이어서 강원도 양구나 경기도 양주 진출설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의 신분은 평민으로 규정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밝힌 김교수는 신돌석이 양반들 사이에 신망을 잃지 않았음을 '만사(輓詞)'를 통해 보여주고있다. 유림들은 함부로 만사를 쓰지 않는데 양반 유림이 그를 기려 만사를 썼다는 사실이 그가 신망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제시했다. 또 일본군이 신돌석 생포작전을 펴고, 그의 아내를 동원해 회유작전을 벌였음이 처음 확인됐다. 하지만 신돌석은 어떠한 작전에도 넘어가지 않았다는 것.

지난 1995년부터 그와 관계된 곳이라면 어디라도 찾아나서 자료를 발굴하고, 검토해 책을 펴낸 김 교수는 "신화의 주인공으로 각인된 신돌석의역사성을 찾아보고 싶어 작업을 시작했다"며 "신돌석은 한국사의 발전을 보여주는 중요한 인물로 유림 지배계급의 사회에서 평민출신 지도자가 탄생한점은 주목할만한 대목"이라고 말했다.

서종철기자 kyo425@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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