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임헌영 세상읽기-파란 저 하늘처럼 투명하게

열대야가 언제냐 싶게 아침저녁 바람은 상쾌하고 하늘은 높고 푸르다. "돌아가리로다. 서고에 먼지가 쌓이려하니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歸去來兮 書架將塵胡不歸)"라고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고쳐 읽어본다.

계절의 순리란 인생이나 역사처럼 우리 소망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우주의 원리에 따라 흐를 뿐이다. 더위가 지나쳐도 가을을 좇을 수는 없듯이 수확의 계절인 가을에 늦더위가 제아무리 심해도 씨앗을 다시 심을 수는 없다. "막바지 열매에 결실을 명하십시오. / 열매 위에 남국의 햇볕을 이틀만 더 주시어 / 익을 대로 잘 익어 마지막 달콤한 맛을 / 묵직한 포도송이 속에 흠뻑 넣어주십시오"라고 릴케가 '가을날'에서 노래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왜 하필 이틀일까? 하루는 너무 짧고 사흘은 너무 욕심스럽다는 시인의 생각일 뿐이지 그게 꼭 48시간을 의미하는 시간은 아닐 것이다.

'남국의 햇볕을 이틀만 더' 필요로 하는 건 비단 포도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일지 모른다. 시원해졌다고 여름옷을 장롱 속 깊숙이 넣기가 무섭게 노염(老炎)은 망령처럼 계절 감각을 비웃는다. 그 이틀을 기다리지 못해 실패한 개인과 역사는 너무 많다. 곧 조급함이 세상의 순리를 역행하는 처사다.

우리 국민은 언제부턴가 저마다 다 정치 시사평론가가 되어 웬만한 술자리에서도 대토론이 전개되곤 한다. 오랜 정치 불신이라는 이상 기온의 계절이 낳은 설익은 열매이긴 하지만 선진국의 정치토론 기피현상에 비하면 자못 희망이 보이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토론은 언제나 어느 쪽이 옳으냐 따져보는 게 아니라 이미 결론을 미리 정해 두고 그걸 상대에게 설득, 강요하기 위해서 자행하는 전도사업일 뿐이라는 데서 언어의 공방전이 치열해지기만 하고 있다.

국민들의 정치 관심도에 비하면 그 정보량이나 이해와 비판력의 수준은 훨씬 못 미치기에 자신의 지연과 학연 등등의 연고에 얽혀 어떤 정당한 논리나 대국적인 견해도 수용하지 않으려는 게 우리가 당면한 가장 큰 불행일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누구나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와 지식과 판단력이 가장 정확하고 객관적이며 신뢰할 만하기에 그 길만이 유일한 절대진리라는 일종의 신앙적인 차원의 논리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이 신봉하는 세력의 승리를 위해서는 우물 안 개구리가 천문학자를 깔아뭉개더라도 그게 정당하다는 식의 논리가 팽배해 있는 형국이다.

우리의 경제 수준이나 교육 정도와는 걸맞지 않게 가장 미개한 분야가 바로 좌우익 편가르기일 것이다. 유럽 선진국은 종교문제로 동족간이나 이민족 사이에 엄청난 피를 흘린 야만과 치욕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극복하는데 오랜 세월이 걸려 이제는 신앙이 다른 사람들과 평화롭게 사는데 너무나 익숙하다. 신앙이 다르다는 것은 세계관과 인생관과 역사관이 판이하기에 엄청난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건만 이를 공존시킬 수 있는 예지를 지니게 됨으로써 유럽인들은 정치적인 이데올로기가 달라도 공존할 줄 아는 방법을 동시에 터득해 버렸고, 그들은 결코 이념 때문에 민족 내분은 않는다. 선진 여러 나라들은 사회당 집권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특히 농민과 중소상공인. 서민의 복지정책은 사회당 집권 때 탄탄한 반석 위에 올려놓은 게 오늘의 유럽형 복지국가의 진면목이래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는 어떤가. 유럽처럼 종교 때문에 민족이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매우 자랑스러운데, 지금이 어느 땐데 아직도 좌우익 이념을 신주처럼 모시고 그걸 모든 가치판단의 잣대로 삼으려는지 남부끄럽다.

사계절의 순리 속에서 자신의 생각만이 진리가 아님을 깨닫고, 무엇이 우리 민족과 국가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길인가란 문제만을 유일 확실한 가치판단 기준으로 삼게 될 때라야 참된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 이 가을에는 하늘을 좀더 자주 쳐다보자.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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