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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바람에게 물어봐(211)-제9부-어둠의 심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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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섭은 예전처럼 하숙집 이층, 철길이 보이는 창가에 멍하니 혼자 앉아 있곤 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 철길은 그리움이 아니었다. 그저 텅 빈 두 평행선이 끝없이 이어져 터널을 지나 멀리 멀리 달려갈 뿐이었다. 이제 더 이상 연희도, 미경도, 애림도 그 길을 따라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예전엔 그리움이었던 철길이 이제는 한없는 절망과 슬픔의 곡선이 되어 형섭의 과거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곧 그 철길 위로 겨울이 오고 눈이 내릴 것이었다.

이제 그 모든 기다림도 끝이었다.

형섭은 학교에도 더 이상 열심히 나가지 않았다. 졸업 논문 준비를 해야했지만 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생기지 않았다. 모든 일이 무의미하고 시들하게 느껴졌다. 말수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혼자서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황이 그런 중에도 농담을 걸어왔다.

"아니, 장형. 실연했수? 얼이 빠진 사람 모양으로…".

형섭은 그의 실없는 농담이 싫어서 가타부타 않고 잠자코 있으니까 황이 지레 조심스러워져서 말했다.

"어허! 진짠가 부네…. 좋아! 내가 술 한잔 사지. 까짓것 하숙집 동지가 좋다는게 다 뭐요? 갑시다! 한잔 마시고 싹 다 날려버리시오".

"고맙지만 됐소".

형섭이 아무런 감정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예전에 당해봐서 알지만 여자란 그때 뿐 지나가고 나면 모두 내가 그때 왜 그랬나 한다니까요. 버스가 지나갈 땐 어쩌나 하지만 금세 다음 버스가 나타나는 법이거든".

형섭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자기 방으로 올라왔다. 뒤에서 황이 계속해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하긴 저럴 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법이지. 세월이 젤 좋은 약이야. 츳!" 그럴 때면 형섭은 어디론가 아무도 자기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망명이라도 떠나버리고 싶었다. 자기와 상관없이 변함없이 시침을 떼고 돌아가는 세상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해 지는 저녁이면 형섭은 혼자 신림동 시장 근처 술집으로 술을 마시러 갔다. 낡은 색등과 조잡한 조화로 장식된 허름한 생맥주집이었다. 마흔 다섯 살의 과부가 주인이었다. 자기 말로는 젊은 시절 연극배우를 했다고 했다.

형섭은 술을 마시고 마흔 다섯 살의 전직 연극배우였다는 여주인과 같이 잠을 잤다. 형섭은 자기 자신을 시궁창에라도 밀어넣고 싶었다. 술에 취해 세상의 가장 더러운 밑바닥에 누워 있고 싶었다. 그러면 차라리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가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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