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온통 미국이 당한 엄청난 테러의 충격에 휩싸여 있다. 우선 무고한 희생자와 그 유족들에게 애도의 뜻을 전한다. 곧 전쟁을 통한 대규모 응징이 뒤따를 모양이다. 절대 다수의 분노한 미국민이 강력한 무력 응징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 문명 충돌과 보복의 악순환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이 거대한 분노의 격랑에 휩쓸려 거의 들리지 않는다.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차분히 대처하기를 요구하기에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 긴박하다. 전쟁은 필연이다. 다만 미국 정부가 전쟁이라는 단기적 결단을 하더라도 그 장기적 파장을 일부나마 고려해주기 기대할 뿐이다. 장기적 전망보다는 단기적 요구가 어떤 결단의 핵심 요인이 되는 것은 인간사 일반의 속성이기도 하다.
경제 정책도 마찬가지다. 이번 사태는 그러잖아도 허덕이고 있는 세계 경제를 결정적으로 위축시킬 것이 뻔하다. 무역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도 그 여파로 인해 더욱 휘청거릴 것은 당연하다. 특단의 단기적 경기부양책을 강구해야만 한다. 구조 조정을 통한 장기적 체질 강화도 좋고 안정 기조의 유지도 중요하지만 이럴 때는 한가롭게 원칙론만 되풀이할 수 없다. 정부의 개입을 줄이고 시장 기능에 맡겨야 한다는 원칙주의에 너무 편협하게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시장의 복원력이 작동하는 데는 대단히 긴 시간이 요구된다. 그동안에 우리 경제의 바탕이 파괴되는 현상을 방치해서는 안된다. 세계적 경제학자인 케인즈도 일찌기 세계대공황의 극복을 위한 처방을 제시하면서 '장기적으로는 어차피 우리 모두 죽는다'고 갈파한 바 있다.
결국 균형 감각의 문제다. 어떤 하나의 입장이 도그마와 이데올로기로 화석화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항생제 남용이 장기적으로 건강을 해친다고 해서 화급한 환자에게까지 항생제 처방을 거부할 수는 없다. 필요할 때는 항생제를 처방하되 장기 사용시의 부작용을 예의 주시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장기적 원칙적으로 시장 기능을 존중하되 단기적 필요성이 존재하는 경우에는 정부의 개입도 허용해야 한다. 이번과 같은 초유의 테러 사태에 대처하는 미국의 입장이 단기적으로 무력 응징쪽으로 기우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은 장기적 원칙으로서의 무력만능주의를 용인하는 것과는 다르다. 일시적 정부 개입의 허용이 시장 원리의 장기적 포기를 의미하지 않는 것과 같다.
경기부양책에 반대하는 철저한 시장주의적 원칙론자들이 미국의 무력 응징에 조건 없는 지지를 보내는 것은 일종의 자기모순이다. 이들은 스스로 예외없는 원칙에 충실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미국의 무력 응징도 장기적 원칙의 입장에서 지지한다는 것일까? 그 원칙은 도대체 어떤 원칙일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보복의 원칙일까? 문명사회의 원칙은 문명사회다운 가치를 담고있는 것이어야 한다. 보복의 원칙은 이미 원칙일 수 없다. 국제관계에서 장기적으로 추구되어야 할 원칙은 용서와 화해.공존일 수밖에 없다. 무력 응징은 어디까지나 일시적 예외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특단의 불가피한 대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시장경제의 원칙하에서 경제적 파탄에 대응하기 위한 특단의 경기부양책이 예외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장기적 가치의 추구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우리는 원칙에 충실한 원칙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원칙 우회의 단기적 불가피성도 일정하게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인간사가 항상 장기적 관점에서만 영위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장기적 원칙의 단기적 우회가 인정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 예외적 인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에도 우리는 항상 유념해야 한다. 제반 문제에 대한 장단기적 접근이 조화를 이룬 사회, 원칙 존중과 그 원칙의 신축적 적용이 무리 없이 이루어지는 사회, 이런 사회야말로 바로 우리가 지향하는 균형 감각을 갖춘 성숙된 사회일 것이다. 권기홍(영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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