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한가위에는 달이 참 밝았습니다. 추석 하루 전날은 마치 여름날 처럼 비가 따라부어 미처 제수를 다 장만하지 못했던 저는 비를 철철 맞으며 동네 장을 보았습니다. 6위를 모시는데지난해보다 간소하게 준비, 다른 때보다 조금 일찍 일이 끝났습니다. 한가위날 아침 일찍 집에서 제사를 모시고, 시댁 식구들과 음식을 나누고 밤에는 친정에도 다녀왔습니다만 추석은 잘들 쇠셨는지요? 올 추석은 개천절 공휴까지 겹쳐서 추석연휴가 다른 해보다 늘어나 4박5일이나 됐지만 이동하느라 오간 시간을 빼고 나면 모처럼 가족과 같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짧고, 또 아쉬웠는지요.
매년마다 명절 전후가 되면 신문 한귀퉁이에 주부들의 명절 스트레스 얘기가 난무합니다. 여자들이 밤늦도록 송편을 빚고 허리가 휘도록 음식을 장만하면 남자들은 제사를 모시고 여자들의 접대를 받으며 고스톱이나 친다던 명절 풍경도 점차 변하고 있습니다. 이웃을 둘러봐도 아들 삼형제가 있는 어떤 집에서는 큰집에서 전과 나물류를 준비하고, 둘째 집에서 생선류를 준비하고, 막내 집에서 튀김류를 맡는 식으로 일을 분담하여 가족 결속력을높이는 계기로 삼는가하면, 어떤 종부는 제꾼들이 먹기 좋도록 음식맛에 변화를 주기도 합니다. 각자 사는 형편에 맞춰서 명절 쇠는 모습이 달라진다한들 어떻습니까. 그래도 명절이 없어지는 것보다는 몇백배 더 낫지 않습니까. 매스컴에서는 주부들의 명절 스트레스가 어쩌니 하지만 대다수 어머니들은 명절에 찾아온 자식들을 챙기느라 몸은 부서질 듯 힘들어도, 행여 소홀한 자식이 있을세라 일일이 마음 쓰느라여념이 없습니다. 형편대로 시시각각 내려오는 자식들의 밥상을 때맞춰 차려내고, 평소에 좋아하던 김치도 담가서 기름진 명절 음식에 질리지 않도록 입맛을 돋워 줍니다. 다소 넉넉하게 제수를 장만해두었다가 하루 이틀 뒤면 후루룩 제 보금자리로 떠날 자식들 앞으로 일일이 송편이랑 전을 나눠줍니다.
직장으로 돌아가는 자식들의 차에는 늙은 호박이랑, 맏물고추, 토종밤, 햅쌀까지 꼭꼭 챙겨 넣어줍니다. 시골길을 바쁘게 내달리며 노는데 정신이 팔린 손자, 손녀들의 손에는붉은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감가지랑, 가을냄새 가득한 모과도 따서 들려줍니다. 모처럼 고향을 찾은 자녀들의 마음에 푸근한 고향의 정을 듬뿍 떼어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멀고 힘들어도 고향을 찾습니다. 왕복 시간을 따져보면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외국의웬만한 도시를 다녀오는 것 이상으로 걸리고 고속도로가 주차장으로 변한다 해도 하등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설령 오늘 내가 사는 모습이 괴롭고 힘들어도 찾아갈 고향이 있는 사람은행복합니다. 고향을 찾아가서 그동안 겪은 자잘한 아픔과 기쁨을 털어놓고, 어려움에 처한 동기간의 딱한 얘기에 혀도 차면서 우애를 나누고, 윗마을 어른들을 찾아뵈면서 고향을 지켜 갑니다.
차에 치일 걱정없이 누렇게 물결치는 황금들판을 쏘다니며 고추잠자리와 메뚜기를 잡느라 정신없이 뛰어다녔던 어린 것들은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두런 두런 얘기를 나누는아버지, 할아버지의 등뒤에서 스르르 잠이 듭니다. 해맑게 잠든 어린 손자·손녀들의 가슴속에 푸근하고 아늑한 고향의 모습이 자라납니다.
명절날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고향을 만드는 일은 바로 우리네 부엌과 어머니들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안살림의 요채로써 주부의 관할하에 놓인 고향의 부엌은 어떤 의미에서 바로 세상과 직결돼 있습니다. 귀향 전쟁을 마다않고 집을 찾아오는 가족과 친척들에게 명절 음식을 만들어대고, 뒷수발까지 하기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한국인의 아름다운 가족사랑과 고향 풍경은 바로 우리 여성들의 손에 달려있지 않나 싶습니다.
부엌을 지키는 어머니들이 명절을 치르느라 자식들을 떠나보낸뒤 몸살을 앓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그보다 세상에서 더 가치있는 일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자식들 가슴에 고향을 심어주는 일인데요. 살다보면 괴롭고 슬프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게 마련인 자식들이 고향의 품을 기억하며 그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사람을 살리는살림살이의 정수가 아닐는지요.
(최미화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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