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초동들이 부르는 꼴베기 노래
'그 꼴 참 아깝다! 잘 드는 낫으로 쓱쓱 베면 한 멍 거뜬히 하겠네!' 산에 오르거나 들길을 가면서 좋은 풀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초등학교 시절학교에서 돌아와 책 보따리를 내려놓기 무섭게 꼴멍을 매고 꼴 베러 가던 일이 새삼스럽다. 아이들이 워낙 꼴을 베어서 꼴이 없으면 벤 자리에서 또 베기도 하고심지어 척박한 들판의 잔디까지 베었다.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은 어디서나 풀이 무성한 것을 보면 참 아깝게 생각된다.
경제도 정치도 문화도 마찬가지이다. 그때에 비하면 경제력은 거의 선진국 수준이고 정치도 민주화되었으며 문화도 인터넷 시대를 주도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경제도 위기이고 정치도 엉망이며 문화도 척박하다고 야단들이다. 왜 그럴까? 하기야 한갓 무명의 청년이 불과 두어 해만에 조폭모가비에서부터 검찰총수와 청와대 친인척까지 손을 뻗치며 수천 억을 제멋대로 주물렀으니 경제든 정치든 순조롭다고 하기 어렵다. 지금 자유당이나 공화당의 독재시절도 아니며, 5공이나 6공의 군부정권 시절도 아닌 데도 상황은 비슷하다. 꼴인지 풀인지 분간을 못하고 초동과 초군, 또는 꼴머슴과 상머슴을 알아보지못하는 데다가 지연, 학연, 혈연끼리 봐주고 밀어주는 패거리 의식이 한탕주의와 만나서 기승을 부린 탓이다. 초동들의 꼴베기 노래를 들어보자.눈이 올러나 비가 올러나
억수 장마 질러나
산천초목에 검정구름이
다 몰려든다~아
강원도 횡성의 서해순 아저씨 노래이다. 메나리 가락으로 구성지게 불렀는데 꼴 베러 갈 때 부르는 노래라고 했다. 꼴 베기를 드세게 할 때는 여름철이자 장마철이다. 꼴멍을 메고 나서는 데 먹장구름이 끼어 날씨가 컴컴해 오면 어설프기 짝이 없다. 베어 놓은 꼴이 없으면 비가 부슬부슬 내릴 때에도 멍을 메고 꼴 베러 나서기 예사다. 따라서 비가 올 것처럼 날씨가 좀 궂다고 하여 꼴 베는 일을 쉴 수 없다. 비 맞을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우비를 갖추지 않고 꼴베러 가는 초동들의 어설픈 심정이 노래말에 잘 갈무리되어 있다.꼴 비는 저 총각아
온갖 잡풀 다 빈따나
기름진 나물랑 나혀두게
이연 삼년 지야지다
우런 님 낙숫대나 하여볼까
나도 죽어 굼붕애 되어
우런님 낙숫대에 걸려나 볼까
상주 사는 고기남 할머니가 노랫가락과 같은 곡조로 부른 노래이다. 노래 부르는 주체가 초동이나 꼴머슴이 아니라 젊은 여성이다. 풀 베는 청년을초군이라 한다면 꼴 베는 소년을 흔히 초동이라 한다. 13세에서 15세 전후의 소년들이 꼴 베는 일을 주로 하는 까닭에 초동이라 일컫는다. 상일꾼 또는 큰 머슴에 대해서 소년머슴을흔히 꼴머슴이라 한다. 꼴을 베고 소먹이는 일을 주로 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처녀들에게 이들 초동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이들도 2, 3년 자라면 총각 티가 난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두 가지로 읽힌다.
하나는 노래말 그대로 꼴 베는 총각들에게 온갖 잡풀은 다 베어도 자라는 나무는 베지 말고 남겨두라는 당부의 의미다. 그 나무가 2, 3 년 길게 자라게 되면 낚싯대 감이 되어서 사랑하는 님이 낚시를 하면, 자신은 죽어서 금붕어가 되어 님의 낚싯대에 걸리겠다는 비장한 사랑의 고백이다. 비장한 은유를 통해 사랑의 감정을 적극 표현한 셈이다.
둘은 노래말의 은유 속에 숨은 뜻을 읽어볼 수 있다. 꼴머슴이든 초동이든 얼른 보면 풋내 나는 풀과 같지만 몇 년만 자라면 곧장 총각 티가 나게 된다. 17세 전후가 되면사춘기에 접어들어 처녀들을 꼬여내고자 밑밥을 던지는 낚싯대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처녀들은 낚시에 걸려드는 붕어처럼 은근히 못 이기는 척 총각들의 꾐에 넘어간다. 따라서 이 노래는 초동들이 총각이 되어 처녀를 유혹하는 낚싯대 구실을 하면 기꺼이 걸려들겠다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오름막 니림막 꼴 비는 총각
눈치나 있거등 떡 받아먹게
그걸랑 받아서 팔매를 쳐고
체네 손목 잡고서 발발 떠네
총각아 낭군아 내 손목 놓게
물 겉은 손목이 잘잘 녹네
물 겉은 손목만 대단하야
생사람 죽는 줄 위 모르나
양소선 할머니가 김계현 할머니 소리에 이어서 '꼴 벨 때 부르는 노래를 나도 한 번 해보겠다'고 하며 불렀다. 초동이나 꼴머슴 티를 벗어난 총각이 꼴 베는 주체가 되자 처녀들의 공세가 한층 적극적이다. 앞의 노래와 달리 2, 3 년 뒤를 내다보고 하는 수작이 아니라 지금 당장 여기서 수작을 걸고 곧장 손목을 잡는 쪽으로 급격하게 발전한다.
남녀간의 사랑을 극적 기법으로 형상화하고 있어서 처녀 총각의 감정이 그림처럼 선명하게 잡힌다. 먼저 처녀가 꼴 베는 총각에게 떡을 준비해서 유혹을 한다. 눈치나 있으면 아무 소리말고 떡이나 받아먹으란다. 그런데 이 총각 보거래이. 주는 떡일랑 받아서 팔매질하듯 멀리 던져 버리고 처녀 손목을 덥석 잡고 발발 떨고 있다. 발발 떠는 까닭은 어디있을까. 넘어서는 안될 도덕적 경계를 넘을 때 비롯되는 심리적 공포의 표현이 아닐까. 처녀로서는 기대 이상의 반응이지만 일단 손목을 놓으라고 한다. 총각이 워낙 억세게 열정적으로 잡은 까닭에 처녀의 물 같은 손목이 잘잘 녹는다는 것이 이유이다. 사랑하는 총각의손길이 짜릿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불길이 닿은 듯 손목이 온통 녹아내릴 만큼 경계심이 무너지고 있는 절박한 심정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절박한 것은 총각이다. 손목이 녹아내리는 정도가 아니라 생목숨이 죽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 같은 손목만 대단하게 여기고 생사람 죽는 줄은 왜 모르나 하고 적극 공세를 편다. 사춘기를 겪는 남녀의 감수성이 퍽 대조적이다. 처녀가 먼저 능동적으로 접근을 하되 정서적이고 은유적인 미묘한 감정을 지닌 데 비하여, 총각은 무뚝뚝하게 수동적인 태도에서 본성적인 격정의 감정을 울컥 드러낸 셈이다. 우리 각시는 어디 가고
밥할 줄은 모르는가
우리 농부는 꼴을 비고
방호소리도 잘도 하네
어여루 방호야
거제도 사는 김주수 어른이 불렀다. 산에 꼴을 베러 갔다가 돌아올 때 산을 내려오면서 꼴베기 꾼들이 함께 선후창으로 부르는 노래이다. 받는 소리가 '어여루 방호야' 하는후렴구를 이루고 있어서 노인들은 '방호소리'라고도 한다. 따라서 꼴 베는 내용과 상관없이 어둑어둑할 때 집으로 돌아오면서 겪는 상황을 노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꼴베기 노래로서 특별한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 농부는 꼴을 비고'라는 대목이 없다면 사실상 무슨 노랜지 알 수 없다.
요즘 나라 돌아가는 형편을 보면 이와 같다. 지금 어느 정권이 정치를 하는지 알 수 없다. 비서 출신과 향우회 인물만 잔뜩 요직에 앉히는 것을 보면 박정권 같기도 하고, 친인척이 관련된 권력형 비리가 뻥뻥 터지는 것을 보면 5, 6공 정권 같기도 하며, 말만 앞서고 실천이 따르지 못하는 것을 보면 김영삼 정권 같기도 하다. 김대중 정부다운 면모가 도무지보이지 않는다.
저물 녘에 초동들이 하산하면서 부르는 노래가 방호소리로 더 잘 알려 있듯이 '제2건국'을 표방하며 '국민의 정부'를 자처한 김대중 정부가 임기말을 앞두고 한갓 'DJ정권'으로격하된다는 사실이 비참하다. 더군다나 국민들 다수가 이제 국정쇄신과 개혁은커녕 권력형비리 척결조차 포기한 상태라는 점에서 더욱 절망적이다. 그것은 김대중 개인의 정치적 실패에머물지 않는다. 민주화 세력의 집권과 정권교체의 역사적 의의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림으로써, 앞으로 진보 진영의 개혁운동이나 자유로운 정권교체의 역동성을 숨죽게 하는 결정적 장애가 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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