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어느 날. 초췌한 한 사나이가 카메라와 기자들에 둘러싸였다. 지옥 문턱에라도 갔다 온 듯한 표정으로 안도의 눈물까지 흘리며 저간의 일을 고백한다. 무대는 홍콩을 비롯한 동남아. 싱가폴 북한 대사관과 여간첩 수지 김이 등장하면서 스토리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아내는 북한 공작원이었고 그녀에게 속아 북한으로 납치되기 직전 극적으로 탈출했단다.
사나이의 입에서 거침없이 구술되는 이 소설 같은 내용은 썰렁한 공안 분위기를 자아내기에는 그야말로 절묘한 소재다. 암호명 같은 수지 김이라는 이름에서묻어 나오는 음습함과 간첩 마누라에게 속아 살아온 이 기막힌 사내의 불행에 대한 동정심, 여기에 더해 마수로부터 탈출성공이라는 해피엔딩까지 갖추게 되니 거의 완벽한 스토리가 된다. 탈출과정에서 겪은 고초로 비록 초췌하기는 하나 깔끔하고 수려한 외모에다 세련된 서울 말씨로 내뱉는 이 사나이의 진술은 그대로 진실이 된다.여간첩 아내의 기만술을 극적으로 이겨낸 이 반공투사의 입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집권자를 위하여 그리고 정권의 반대자를 향하여 기어코 세치 혀를 놀린다. 그게 [카더라] 방송 수준이라도 전혀 상관없다. 간첩한테 들은 말인데 무슨 증거가 새삼 필요하단 말인가. 아니면 말고 식이다.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이게 모조리 사기극이란다. 뚝심의 사나이 장모라는 작자가 안기부장으로 있으면서 그 특유의 똥배짱으로 지어낸 진짜 소설이란다.아내를 살해한 살인자는 반공투사로 둔갑하고, 딸을 살해당한 어머니와 형제들은 간첩 가족이 되었다. 그 뒤로도 반공투사는 공안기관의 특별관리를 받으면서 수백억을 모은 벤처기업가가 되었고, 피살자의 가족은 온 집안이 쑥대밭이 되었다는 소식이다. 정말 양아치들이다. 이 따위 짓거리를 천연덕스레 꾸며댄 장 아무개와 그 졸개들, 알고도 입 다물고 있었던 관련기관의 그렇고 그런 것들 모두 다. 국민을 상대로희대의 사기를 치고도 그것을 국익수호로 믿었을 권력자들의 그 단순함에 놀랄 뿐이다. 십수년이 지나도 그 무지몽매함은 어찌 할 수 없나보다. 그 사기극을 덮어두라 하고 그런다고 덮어버렸다니. 그런 당신들에게 국가기관을 맡겨놓고 있는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잊는다.
대구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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