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입적한 혜암 스님은 하루 한 끼만 먹는 1일1식(一日一食)과 오래 앉아 눕지 않는 장좌불와(長坐不臥), 잠 자지 않고 참선에 몰두하는 용맹정진(勇猛精進)의 치열한 수행으로 유명했다.
속명이 김영남인 혜암 스님은 1920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마치고 한학을 익혔다. 17세 때인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45년 귀국한 뒤 27세 때인 1947년 해인사로 출가했다.
출가 때 은사인 인곡(麟谷) 스님이 "어디서 왔느냐"고 묻자 "아악"이라 대답했고, "고향이 어디냐"는 물음에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원을 그렸다는 출가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혜암 스님은 나중 효봉(曉峰) 스님을 계사(戒師)로 수계 득도했다.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성철(性徹) 청담(靑潭) 향곡(香谷) 스님 등 20여명과 함께 불교 진흥을 위한 4년 동안의 결사안거에 참가했으며, 6·25로 스님들이 흩어지자 해인사·송광사·통도사·범어사 등 선원과 태백산·오대산·지리산 등을돌며 참선에 정진했다.
혜암 스님은 감기에 걸리면 엄동설한에도 옷을 벗고 계곡 찬 물에 들어가 정진할 정도로 수행에 철저했다.
평소 '가야산 대쪽'이라 불리며 대표적 선승(禪僧)으로 꼽혀 왔던 혜암 스님은 1990년대 중반 이후 분규로 흔들리던 조계종을 지켜냈다. 1994년 조계종이 서의현(徐義玄) 총무원장 3선 문제로 극심한 분규에 휘말리자 원로회의 의장으로서강한 지도력을 발휘, 반(反) 서의현 입장을 확고히 함으로써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또 98년 분규 때도 총무원을 무력으로점거한 '정화개혁회의'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혀 분규의 합법적 해결을 이끌어 냈다.
혜암 스님은 열반 직전 '나의 몸은 본래 없는 것이요(我身本非有), 마음 또한 머물바 없도다(心亦無所住), 무쇠 소는달을 물고 달아나고(鐵牛含月走), 돌사자는 소리높여 부르짖도다(石獅大哮吼)'라는 임종게(臨終偈)를 남겼다.
합천·정광효기자 khjeo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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