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라기 같은 눈이 내리던 7일 오후2시경. 경북 경산에 위치한 한국조폐공사 경산조폐창은 출입통제가 제법 깐깐했다. 신분증을 내밀고 출입증을 건네받아 지하벙커 같이 생긴 조폐창 건물을 들어가서도 검문검색은 여전히 삼엄했다.
지하철 역처럼 카드식 출입구를 거쳐서야 비로소 본 건물 진입이 가능했다. 그러나 취재진들에게는 아직도 많은 절차가 남아있었다. 보안담당 직원이 취재진들에게 출입승인, 서약서, 촬영명세서 등의 여러가지 서명을 잇따라 요구했다.
지난 해 말 보안을 이유로 취재 요청을 한차례 거부당한 적이 있는 취재진으로서는 조폐창의 까다로운 요구에 순순히 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번거로운 절차가 불가피한 까닭은 이곳이 각종 화폐와 주화를 찍어내는 '돈공장'이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목표 시설로도 가장 중요한 '가'급 기관이다.
지하에 위치한 인쇄처 인쇄1과.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부지기수의 돈이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이날은 1만원권 인쇄작업을 이미 끝마치고 대신 1천원권 인쇄작업을 하고 있어 아쉬움이 없지 않았으나 그래도 눈앞에 수억대의 지폐가 한눈에 들어왔다. 중간 제조공정의 화폐는 전지 1장에 1만원권은 32개, 5천원권은 24개, 1천원권은 40개가 새겨진다. 이 전지가 다시 절단작업을 거쳐 화폐 완제품으로 출시되는 것이다.
백지로 된 전지가 수차례의 인쇄공정을 통해 우리가 쓰는 화폐로 제모습을 갖추어 가는 과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30년째 화폐제작 작업을 해온 차용식(49) 생산관리과장은 화폐 재료인 용지는 종이원료인 펄프가 아니라 솜이라고 귀띔해줬다. 화폐전지는 충남 부여조폐창에서 만들어지며 나머지 공정은 이곳 경산조폐창에서 모두 이뤄진다.
여기서 만들어진 화폐는 묶음을 통해 한국은행에 배급돼, 최종적으로 각 은행에 보내진다. 운반시 지게차를 통해 트럭에 옮겨지지만 신권 1만원권으로 된 1억원의 무게가 12kg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이 얇디얇은 주머니를 아쉬워하며 새해 소원으로 '그저 돈벼락 한번 맞아봤으면…'하고 빌어보지만 이곳 조폐창에서 '돈벼락'사태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횡재가 아니라 안전사고이자 산업재해에 불과할 뿐이다.
이들 화폐가 조폐창 직원들에게는 '돈'이 아니라 마치 신발공장의 신발처럼, 자동차공장의 자동차처럼 그냥 하나의 제품일 뿐이기 때문이다.10년째 조폐창에서 근무해온 백수진(30.여)씨는 "하루에 만지는 돈만 해도 수억원이 넘지만 돈으로 생각해본 적은 한번도 없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옆켠에는 중간 공정 과정의 1천원권 화폐를 헤아리는 계수기가 설치돼 화폐가 인쇄된 전지가 몇 장인지를 세고 있다. 1996년 이전 자동화가 이뤄지기전만 해도 이러한 계수작업에 여직원 200명이 주야로 투입됐다. 계수작업뿐 아니라 검사작업도 꼼꼼한 손길을 필요로 한다. 각 화폐에 찍힌 일련번호, 특정 부분의 인쇄가 잘못됐을 경우 파쇄하는 작업도 필수적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화폐는 엄격한 보안조치로 인해 수십차례의 자체 검열을 거치고 있다. 각 부서별로 공정과정에서 출하량을 명시해서 다음 단계로 이어지기 때문에 각 단계별로 엄격한 책임이 부과된다.생산공정에 참여하는 전 직원들은 지갑 등을 생산현장에 휴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커피 등 자판기도 주화가 아닌 매점에서 구입한 '특별 코인'을 사용해야 한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100원이나 500원 주화와의 혼용을 막기위해서다.인쇄처 건물 건너편 500여m 지점에 위치한 주화처는 동전을 생산하는 곳. 돈을 만드는 조폐창이라 '경제적 가치'가 우선일 것같지만 사실상 그러하지 못했다.
1만원권 화폐의 생산원가가 80원 가량쯤돼 그럴법 하다고 여겼지만 500원 주화는 80원, 100원 주화는 60원에 육박,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 게다가 10원 주화는 아예 3배가량 더 높은 32원, 5원 주화는 121원, 심지어 1원짜리 주화는 111원으로 원가보다 100배 이상이나 높았다.
이곳에서는 우리나라 동전은 물론 이스라엘, 아르헨티나 등 외국 주화를 생산, 수출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주화 제조기술은 금속 순도(純度), 불순물 처리 등 재질문제를 제외하면 가히 세계적인 수준에 이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76년부터 주화를 수출하기 시작, 지난 해 말까지 무려 71억개의 외국 주화를 생산해왔다고 한다.
주화처 압인부 김동일(45)씨는 "기계 자동화로 업무 자체는 한결 편해졌지만 목에 낀 쇳가루를 없앤다며 동료들과 함께 돼지고기와 막걸리를 주고받던 지난 시절의 낭만이 사라지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류승완기자 ryusw@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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