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진덕규칼럼-'사랑은 아무나 하나'

아침저녁 출퇴근 시간 버스에서 자주 듣는 노래가 있다. 태진아의 '사랑은 아무나 하나'이다. 버스 기사가 태진아의 팬인지 지난 가을부터 지금까지 내가 타는 버스의 스피커에서는 그 노래만 되풀이하고 있다.

처음에는 심상하게 여겼던 것도 자주 듣다보니 이제는 따라 할 정도가 되었다. 정말이지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님을,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나타나도 내 마음대로 사랑하는, 일방적인 사랑은 비극임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지는 것이기에 그것의 실현도 담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창 사랑에 들뜨면 무슨 말인들 못할까. 온갖 말로 달래고 얼러서는 사랑을 얻어도 그 사랑을 책임질 능력과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면 결국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 것을.

요즘 한창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대선 후보자로 나서겠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이 사람은 젊음과 참신함을 지녔기에, 저 사람은 민주화에 피 흘린 운동권의 지도자였기에, 이 분은 어느 지방 출신이고, 또 어떤 이는 누구의 자식이고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대선 후보자로 나서겠다는 것이다.

허기야 누군들 후보자로 못 나올까. 민주사회인데, 내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는 민주공화국의 시민인데, 무엇인들 망설일까. 그냥 하면 되는 것을. 마치 사랑하고 싶다는 말을 마음 내키는 대로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사랑을 얻어 행복을 열기 위해서는 전제되어야 할 조건과 상황이 따르게 된다. 마찬가지로 대선 후보자로 나서는 것에도 최소한의 요건이 충족될 수 있어야 한다. 경륜과 능력이 그 요건이다. 여기에다 책임감이 덧붙여지면 좋을 것 같다.

우리나라를 어떤 국가로 이끌 것인지를 밝히는 국가 비전의 체계적인 구상을 국가경륜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그것은 좋은 말만 늘어놓고 지킬 수 없는 약속으로 끝나는 얄팍한 속임수와는 다르다. 경륜이 있다해도 그것을 일굴 능력이 없다면 그것 역시 만사와해일 뿐이다. 실천적 능력에 의한 경륜이야말로 지도자의 더 할 수 없는 덕목이다.

그러기에 지도자로서의 최소한의 지적 요건을 어느 학자는 PPE라고 말했던 것 같다. 즉 철학과 정치학 그리고 경제학에 대한 기본 지식과 식견을 갖는 것이야말로 지도자의 지적 요건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투철한 책임의식, 이것은 거짓말하지 않는 지도자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밤낮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면서도 정작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 그때그때만 모면하려는 뻔뻔함이야말로 가장 무책임한 작태이다.

나라를 험난한 골짜기로 처박아서는 온 나라 사람들에게 고통의 시련을 더 해준 이 상황에서 해방시켜 줄 그러한 지도자라는 것을 입증한 뒤에야 비로소 후보자로 나서겠다는 말을 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대선 후보자로 나서겠다는 사람들 자신이 이러한 요건을 충족시키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밝혀 놓아야 한다. 그것은 지난날의 삶에 대한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질과 수준의 의미이다. 이웃과 사회와 나라를 위해 과연 어떤 책임과 헌신을 다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그것의 관건일 수 있다.

겨우 국회의원 한두 번 한 것으로, 뛰어난 웅변술을 가졌기에, 그렇고 그런 정도의 이유만으로 후보자로 나서겠다는 것은 정말 너무 염치없는 짓이다.

대선 후보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의 뉴스를 듣노라면 곧장 태진아의 그 노래가 떠오르는 것은 사랑과 대선의 후보자와 너무 닮아서 일까.

"사랑은 아무나 하나/ 눈이라도 마주쳐야지/ 만남의 기쁨도 이별의 아픔도 두 사람이 만드는 걸/ 어느 세월에 너와 내가 만나 점하나를 찍을까·/ 사랑은 아무나 하나/ 어느 누가 쉽다고 했나·" 정말이지 언제쯤이면 눈이라도 마주칠 그러한 후보자의 선언을 마주할 수 있게 될 것인가. 아니면 언제까지나 이 노래로만 사랑과 대선 후보자에 대한 아쉬움을 때워야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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