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하는 오후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곽재구 '沙平驛에서'

사평역은 우리 소설에서 '무진'(김승옥)이나 '삼포'(황석영)처럼 가상의 공간이다.대구 인근의 조그만 시골 간이역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아름다운 이 서정시의 배후에는 80년 광주사태라는 근대국가의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중국의 두보는 국가의 불행이 시인에게는 행복이다라는 말을 한 바도 있지만 이 시에 적용하기에는 너무 가슴이 아프고 아리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해야만 했던 파시즘과 야만의 시절이 역설적이게도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탄생시켰다.

김용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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