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임에도 그곳엔 무력감이 배어 있었다. 날씨는 풀려도 한번 얼어붙은 몸과 마음은 쉽게 녹을 줄 몰랐다. 노숙자.쪽방사람들.홀몸노인들의 배고픔을 달래주는 무료급식소. 제때 식사하는 경우가 드문 이들로서는 이곳의 한끼 식사가 더없이 소중할 수밖에 없다.
지난 13일 일요일 저녁 7시 30분 지하철 대구역 광장. 따뜻한 국물이 그리웠을까. 아직 배식 시간이 한시간이나 남았음에도 벌써 10여명이 진을 치고 앉아있다. 이곳에선 노인 30여명과 20~50대 100여명 등 모두 130여명이 1년 365일 저녁을 먹으며 배고픔을 잊는다.
칠성파출소 자율방범봉사대가 사용하는 컨테이너 뒤 간이취사장에선 음식준비가 한창이다. "춥지않아서 다행입니다. 추위가 심하면 설거지하기조차 어려워지죠" 대구 상인동 두레교회(이상욱 목사)에서 왔다는 석선애(45.대구시 달서구 진천동)씨는 따뜻해진 날씨를 고마워했다. 지독히도 추웠던 작년 겨울엔 여기서 밥을 먹는 사람이나 준비해주는 자원봉사자들이나 다 고생이었다고 했다. 바람막이조차 없는 급식소.
황량한 거리에서 온몸으로 고스란히 추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고. 배식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어둠을 뚫고 하나 둘 노숙자들까지 모습을 드러낼 무렵 자율방범봉사대 사무실로 이모(20.대구시 남구 대명동)씨가 들어왔다. 이제 막 노숙자 생활로 들어선 듯 비교적 옷차림이 깨끗했다. 노숙자들의 대부로 알려진 김무근(52) 자율방범대장이 주민등록증을 보며 장부에 일일이 신상명세를 기입한다. 일련번호 2,123번. 장부는 98년 이후 이곳을 거쳐간 사람이 2천명을 넘는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저녁 8시 30분. 어느새 100여 명이 길게 줄을 섰다. 도무지 이 줄은 IMF 직후나 지금이나 줄어들 낌새가 없다. "겨울을 나기 위해 노숙자쉼터나 복지시설로 들어간 경우가 많아 숫자가 줄었습니다. 봄이 되면 그들도 쏟아져나와 엄청 늘어나겠지요" 처음부터 이곳 노숙인 무료급식지원센터 일에 관여해온 김 대장은 2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원은 비슷하다고 했다.
앞쪽 줄에 서있던 이득노(69.대구시 북구 칠성2가)씨가 어느새 줄 맨 뒤쪽에서 식판을 들고 두번 째 배식을 기다리고 있다. 먼저 받은 한끼 식사는 이미 내일 아침거리로 챙겨둔 듯. 리어카를 몰며 파지를 모아 파는 이씨는 요즘은 일거리 자체가 없어 노는 날이 더 많다고 했다. 점심은 보통 도로 건너편 무료급식소 '요셉의 집'에서 해결한다.
그래도 오늘은 운이 좋았다. 교회 세 곳을 돌며 5천원을 벌었기 때문이다. IMF이후 예배에 참석하는 노인들에게 교통비 형태로 주는 돈을 모은 것. 이씨에겐 1주일간 종이상자 100㎏을 모아야 챙길 수 있는 거액이다.
노숙인 무료급식소를 다시 찾은 15일밤엔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비 때문에 모두 마음이 무거워서일까. 식사중엔 아무도 말이 없다. 서로 다 아는 처지이건만 안부를 묻지 않는다.
밥을 받아들자마자 저마다 재빨리 처마 밑으로 향한다. 조금이라도 늦었다간 자리가 없어 빗속에서 식사해야할 판. 일부는 힘에 겨운 듯 비에 젖은 시멘트 바닥에 털썩 앉기도 한다. 그렇게 급하게 한끼를 해결하곤 이내 사라진다.
이틀 전 이곳에 등록한 초보노숙자 이모씨가 두 번째로 받은 식사를 할 무렵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그의 부모가 외아들인 그를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찾아온 것. 며칠째 찾아다니다 여기서 무료급식을 한다는 말을 듣고 혹시나 해서 와봤다는 아버지 이모씨는 억장이 무너진다고 했다. 사소한 꾸중에 집을 나가 대구역 대합실에서 새우잠을 자고 무료급식소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아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
오늘 급식은 격주로 이곳을 찾는 칠성시장 상인 3명과 대구 남부경찰서 경무계 직원 8명이 맡았다. 박덕주(장군상회), 조덕자(충남상회), 주명옥(제일상회)씨 3명이 매일 2천원씩을 모으고 여기에 경찰관들이 한번씩 올 때마다 지원금을 보태 경비를 충당한다.
"오랫동안 이 일을 하다보니 이젠 생활의 일부가 됐죠. 힘들기는 해도 마음만은 늘 부자입니다" 이기훈 경사는 급식일이 보기보다 힘들어 남자도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며 앞치마를 고쳐 맸다.
이곳에 배낭을 메고 나타나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노숙자들. 커다란 가방을 둘러멘 김모(43)씨에게 굳이 노숙하는 이유를 물었다. "밥은 여기서 해결하고 잠은 역에서 자면 되니까 솔직히 일할 필요가 없지요. 하기야 일하고 싶어도 일거리도 없지만…"
마침 무료급식 현장에서 만난 노숙자 지원센터 '길찾는 사람들'의 이재봉 소장은 "제 몸도 제대로 씻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자립의지가 있는 노숙자들이 정말 일하고 싶을 때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현장시설을 갖추는 것이 근본 해결책"이란 견해를 보였다. 무료급식소를 찾는 이들이 그리워하는 건 밥 한 그릇과 따끈한 국물만은 아닌 이유이기도 했다.
박운석기자 stoneax@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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