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한겨울인데. 일기예보를 곧이 곧대로 믿지 않은 업보였을까. 준비해 간 두툼한 외투가 번거롭기만 하다. 이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난데없는 봄기운이라니. 서해바다에도, 천년고찰에도 바람 한 점 없다. 그저께까지 진눈깨비가 날리고 코베어갈 것 같았다는 추위는 온데 간데 없고 거짓말처럼 화창한 어느 봄날 같다. 사람들은 잠시 계절을 탈출한 착각에 빠진다. 이번 주말은 다시 강추위가 온다는데….
반도의 서편, 거기서도 또 다시 작은 반도를 이루는 곳. 전라북도에서 가장 긴 해안선을 가진 부안의 변산반도가 있다. 곱디고운 산과 바다가 만나는 데다 평야와 개펄이 연이어지는 절묘한 조화. 거기다 수백년 역사가 아로 새겨진 유적지가 곳곳에 흩어져 있어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에게 풍성한 여정을 안겨 준다.
변산반도 여행은 김제.태인을 지나면서 만나는 평야지대에서 시작된다.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 산이 많은 경상도 지방에서 보기드문 풍경이다. 드문드문 허리를 굽힌 낮은 둔덕마다 산소가 오롯이 줄지어 있다.
부안읍을 지나면 어느 순간 산자락이 보인다. 개펄도 나타난다. 바다와 땅이 하나가 된다. 눈을 다시 비비게 만든다. 굳이 구분이 있다면 변산반도를 일주하는 30번국도가 둘 사이를 훼방놓는다. 새만금 간척공사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새만금 전시장. 우리나라 지도를 바꾸어 놓는 대역사. 반면 개펄의 중요성이 부각된 요즘, 또 하나의 애물단지가 되는 건 아닌지 생각하게 해주는 공간이다.
회색빛 바다를 내려다보며 해송이 어우러진 해안길을 잠시 달리면 격포항이다. 바로 추억의 바다, 채석강과 격포해수욕장이 펼쳐진다. 가족끼리 온 팀은 왼쪽 채석강으로, 젊은 연인들은 사람 발자국이 안 찍힌 오른쪽 격포해수욕장으로 향한다. 붐비는 사람 탓일까. 겨울바다의 을씨년스러움은 없다.
동해바다처럼 힘찬 파도도 없다. 그 흔한 갈매기조차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또다른 멋이 있다. 그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진다. 그 바다 앞에서는 침묵한다. 그러나 그 침묵속에는 어떤 웅변보다 더 간절함이 스며있다.
채석강은 오랜 세월동안 파도의 침식작용으로 형성된 수성암층 절벽이다. 절벽엔 수만권의 책을 켜켜이 쌓아놓은 듯 검거나 누런 갈색의 지층이 속살을 드러낸다. 멀리서 보면 검은 병풍을 둘러쳐 놓은 것 같다. 절벽 아래 여기저기에는 해식동굴이 뚫려 있다. 동굴까지 기어코 올라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도 있다. 물때가 맞아야 등대가 마주 보이는 채석강 끝까지 걸어가 볼 수 있다.
햇살의 각도에 따라 색깔을 바꾸는 채석강은 아무래도 저녁 석양무렵이 감상의 포인트. 붉디 붉은 노을이 바다를 태울 듯이 드리우면 채석강도 오묘한 색깔로 변신한다. 채석강과 바다와 노을이 서로를 추켜세우며 한폭의 파스텔풍 그림을 만든다. 채석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적벽강 또한 바다를 향한 층암절벽이 뒤질세라 자태를 뽐낸다.
격포항에서 내소사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30번 국도)는 바다를 끊어질 듯 이어주며 차창밖으로 줄곧 아늑한 풍경을 보여준다. 내달리기 좋은 동해안 7번국도와는 다른 맛이다. 평온한 곰소만의 바다와 개펄이 내소사까지 짧지 않은 길을 금방 안내해 준다. 백제 무왕 34년(633년)에 창건됐다는 내소사는 초입에 전나무 숲길이 먼저 나온다.
쭉쭉 곧게 뻗은 미인의 각선미를 보는 듯 길손의 마음을 쏙 빼앗는다. 일주문에서 천왕문에 이르는 700m의 터널이다. 흙냄새에다 침엽수 특유의 상큼한 기운이 온몸에 퍼지며 마음이 절로 느긋해진다. 숲길이 이만하니 번잡한 세상사는 까마득히 잊혀지고 만다.
전나무 숲길을 벗어나면 내소사 경내. 깎아지른 듯한 뒤편 능가산이 경내를 싸고 있는 가운데 여러 채의 불전들이 ㅁ자형으로 들어앉아 있다. 가장 돋보이는 것은 화려한 꽃문살로 치장한 대웅보전. 쇠못 하나 안쓴 목조건물이다. 정면 문짝마다 소담스런 연꽃과 국화꽃이 가득 새겨져 있어 늘 화사한 꽃밭을 이룬다.
오랜 풍상으로 색바랜 단청, 나무의 소박한 질감과 색채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화려하면서도 번잡하지 않은 내소사의 독특한 분위기가 물씬 풍겨 난다. 순간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빈마음이 차곡차곡 채워진다. 대구답사마당 (053)-423-1885)은 오는 3월3일 '봄이 오는 변산반도'로 답사여행을 떠난다.
노진규기자 jgroh@imaeil.com
▨가볼만 한 곳=변산반도는 가히 '답사여행의 보고'라 불릴만 하다. 백제의 천년고찰 개암사, 백제부흥운동의 근거지였다는 울금산성, 고려청자 가마터였던 진서면 진서리 도요지, 보안면 우동리 반계 유형원 유허지, 하서면 구암리 고인돌군 등은 변산반도의 장구한 역사와 융성했던 문화를 말해주는 유적들이다.
격포리 수성당 부근의 후박나무 군락(천연기념물 제123호)과 국도변 호랑가시나무군락(천연기념물 제122호)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곰소만 염전과 젓갈시장도 둘러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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