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면, 혹은 우연히 몇몇 사람들과 어울려서 차라도 한 잔 마시러 가거나, 아니면 오가던 길에 차를 잠시 세우거나 버스에서 갑자기 내리고 싶은 충동에 의해서, 또는 홀로 세상과 연인에게 버림받은 쓸쓸함을 가슴에 묻은 채 방황하는 적막한 산책길에, 우리는 겨울 유원지의 그 황량한 풍경에 문득 들어서게 되곤 하는 것이다.
겨울 유원지… 그것은, 지나간 화창한 봄날의 따사로운 그러나 부푼 어지럼증과 같던, 때로 까닭 없이 아프곤 하던 꽃잎들의 화사함을 거쳐… 여름밤의 뜨거웠던 입김 가득한 다분히 육감적인 열정들과, 그 푸르디푸른 나뭇잎들이 작열하던 햇살아래 반짝이며 빛나던 생명의 축제를 거쳐… 가을의 우수수 떨어지며 쓸려 다니던 낙엽들과 더불어 퇴색해 가던 가을햇살의 쓸쓸한 조락을 거치고 거쳐… 우리들 삶의 한 궁극이 보여주는 어떤 쓸쓸함 같은 것으로, 그렇게 쓰다버린 폐품처럼 텅 빈 채 버려져 있다.
삶의 기쁨과 슬픔 담긴 잿빛 풍경
유원지 입구 부근에는 퇴락한 상가들과 유희시설물들이 늙어버린 표정으로 웅크리고 있는데, -새로 들어선 호화스런 외양의 대형 유리창을 가진 레스토랑 건물이 오히려 이 풍경에선 생경스럽다- 낡은 비닐포장이라든가 마구 쓴 듯한 페인트 글씨는 지워지거나 찢겨져 나가고, 쇠붙이로 된 놀이시설들은 벌겋게 녹이 슬거나 싸구려 페인트로 덧칠한 자국이 거칠게 드러나 있다.
물가에는 플라스틱으로 된 보트나 수상자전거들이 땅 위로 끌려나와 엎어져 있고, 유람선은 낙엽들을 수북이 싣고 먼지를 덮어쓴 채 발이 묶였다. 생각해보면 낙엽 지던 가을의 을씨년스런 가을비가 이미 이 황량함을 예고했던 바 아닌가.
날씨가 차가워지면 칼날 같은 바람만이 유원지를 휩쓸고 몰려다니는데, 그 바람을 울울히 견디며 이태리포플러들은 큰 키로 서로의 어깨를 맞대고 빈 가지들로 잿빛 하늘을 덮어준다. 그 밑엔 빈 방범초소 벽을 바람막이로 점쟁이 노인이 그림처럼 표정 없이 웅크리고 추위를 견디고 있고, 휴가 나온 장병이나 쉬는 날을 주체 못해서 나온 공원들이 어쩌다 하나 둘 간간이 흙들이 까슬하니 메말라 얼어붙은 빈 산책로를 따라 어슬렁거리곤 하였다.
또 한 무리의 대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근처 싸구려 대폿집에서 대낮부터 취해서, 구석진 곳에서 구토를 하거나 비틀대며 어깨동무를 하고서는, 사회로의 첫출발의 불안감과 헤어짐의 아쉬움을 노래로 달래며 지나가고, 가끔은 아직도 가난한 연인들이 차가운 벤치에 걸터앉아 수줍게 손을 잡고 찬바람을 견디다가 어디론가 사라지곤 하였다.
겨울이 깊어 봄도 머지않다
유원지, 오월의 따사로운 햇살 아래 여유로운 휴식과 즐거운 보트놀이나 놀이기구를 타며 하루를 가볍게 보낼 수 있던 곳, 살아있음의 기쁨을 누릴 수 있던 그 유원지도 겨울엔 이렇듯 황량한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 겨울 유원지도 우리가 어리거나 젊은 시절에는 나름대로 추억의 장소가 되어 주었었다.
강물이나 호수는 겨울이면 어김없이 꽁꽁 얼어붙어 주었고, 얼음판 위에서 썰매나 스케이팅을 즐기며 군불을 쬐고, 군밤이나 군고구마를 사 먹곤 하던 추억이 이제 가을의 쓸쓸함을 이해하는 나이의 사람들에겐 하나씩 가슴에 아련할 것이다. 그런데, 이젠 물도 잘 얼어붙지 않는다.
오염과 온난화로 인해 더 이상 추억의 장소가 되지 못하는 겨울 유원지… 요즘 와서 더 추억 없이 황량하기만 한 겨울 유원지… 생각건대, 살아있음의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그 추억들까지도 이 잿빛의 쓸쓸한 풍경들의 밑그림에서 떠오른, 한때 찬란한 무지개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겨울 유원지여, 너의 풍경은 그렇게 쓸쓸하니 처연하여 아름답다.
이제 곧 다시 봄은 올 것이다. 겨울이 깊어… 봄도 그리 머지않은 것이다.
임원태(대구가톨릭대 교수.조경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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