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진덕규칼럼-'연성정치'의 시대

잉글하트가 '조용한 혁명'을 저술한 것은 1977년이었다. 그의 주장이 사실로 입증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980년대 초반부터였다. 계급투쟁이나 사회혁명과 같은 주장이 더 이상 먹혀들지 않는,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식으로 달려갔다.

살벌한 구호 대신에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 즉 '삶의 정치'가 주장되고 있다.투사의 시대에서 벗어나고 있다. 혁명가가 지도자로 군림했던 시대도 끝났다. 다정하게 우리 곁에 다가와 조용한 목소리로 우리의 일상 문제를 함께 의논할 수 있는 내 이웃 같은 지도자, 내 친구 같은 정치가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정말이지 18세기부터 근 200여 년 동안 사람들은 이데올로기 때문에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좌익이며 우익이라는 구분도,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라를 전부처럼 여겼으며 그것들을 절대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했다.자기 이념과 다른 사람을 적으로 몰아야하는 투쟁만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던 편벽된 사고가 되풀이되었다.

그러다 보니 길거리는 온통 붉은 현수막으로 장식되었고 벽이며 길 모퉁이는 섬찍한 구호들로 난무하는 살벌한 이데올로기의 천지가 되어 버렸다. 인간을 위한다는 그 이데올로기가 결국은 인간을 억누르는 반인간적 것으로 자리잡았으며 끝내는'시대의 유령'이 이 골목 저 모퉁이를 서성대고 끝내는 무고한 사람들을 사냥질하기도 했다.

그러한 시대가 끝났다. 동서 냉전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세워진 베를린 장벽도 무너졌다. 모스코바 붉은 광장의 레닌 동상도 소리 없이 옮겨졌다. 군중들의 충혈된 눈과 피비린내 나는 구호로 혁명의 승리를 다짐했던 그 자리에는 이제 관광객들로 가득차 버렸다.

러시아 대통령과 미국 대통령이 다정하게 포옹하면서 산책하는 시대가 되었다. 실로 적(敵)이 없는 시대라해도 좋다. 원수로 지내면서 서로를 증오하기보다는 하나되는 마음으로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 다정한 손길을 마주 잡는 그러한 시대가 되었다.

이처럼 달라진 시대에 혁명투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처럼 변모된 세상에서 전쟁과 투쟁만을 전부로 여기는 전업 정치가들이야말로 반시대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이념이 아니라 생활이 소중하다. 더 이상 대결이 아니라 타협이 가치롭다. 더 이상 갈등이 아니라 화해가 보다 의미있다. 이렇게 달라진 시대이고 보니 정치의 흐름도이전의 그 투쟁적인 정치를 '경성정치(硬性政治)'라면 달라진 오늘의 정치는 '연성정치(軟性政治)'라고 구분할 수 있다.

전 세계가 연성정치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연성정치의 기본은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고, 이슈의 효과적인 해결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연성정치의 3대 영역을 흔히 3E라고 부르는데 그 첫째가삶의 환경(environment)이며, 둘째가 고용(employment)이고, 셋째가 교육(education)이다. 이들 영역이 곧 정치사회의 공동의 과제로 받아들여진 사회, 그것이 바로 연성정치의 지배이다.

연성정치의 시대가 열린 지 한 세대가 지났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의 정치만은 경성정치의 그 흉한 겉옷을 벗어 던지지 못하고 있다. 살벌한 구호가 넘쳐나고 죽기 살기 식의 '제로 섬' 개임이 판치면서 현실성 없는 선동이 대단한 정치 논리처럼 여겨지고 있다.

냉전 이데올로기 시대의 그 모습에서 한치도 못 벗어나고 있다. 어느 면에서는 조선왕조의 사색당쟁이나 권신통치의 잔재를 둘러쓴 것 같고 해방정국의 좌우익 투쟁이 그대로 지속되는 것만 같다.

고착되고 정체된 정치사회 그것이 우리 정치인지도 모른다.그러므로 우리 정치의 현실적 과제는 경성정치에서 성큼 벗어나 연성정치로 달려가는 일일 것 같고, 그것을 가늠하는하나의 계기가 바로 올해인 것 같다.

이화여대 교수·정치외교학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