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현장파일 이곳-복권 판매대 풍경

복권 열풍이 분다. 영세 사업가 혹은 월급쟁이의 지갑 속에서 복권 한 두 장을 찾아내는 일은 이제 어렵지 않다.

복권을 새 수익모델로 파악한 대형 금융기관들이 앞다투어 시장에 뛰어드는가하면, 주가를 예상하는 인터넷 복권도 등장했다. 한국의 복권 열풍을 주시해온 호주 최대의 복권사업체 TMS도 한국 상륙을 서두르고 있다.

사행심 조장, 성실성 결여 등,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복권. 사람들은 무슨 이유로 복권을 사는 것일까.한 평이 될까말까한 복권 판매 부스 앞. 갖가지 사연과 꿈을 간직한 사람들이 복권을 사고 돌아서기를 반복한다. 복권을 손에 쥔 그들의 어깨는 좀전보다 확실히 넓어지고 얼굴엔 희미한 미소까지 생겨난다.

'당첨되면 좋고 안돼도 그만…'. 대부분 사람들은 재미로 복권을 사지만 간절한 소망을 안은 채 정기적으로 복권을 사는 사람들도 적지않다. 29일 대구시 달서구의 한 슈퍼마켓에서 복권 1만원 어치를 산 임경훈씨. 매주 1만원 어치 복권을 산다는 그는 지난 해 작은 가게를 열었다 실패했다.

"사업을 시작해서 1년만에 딱 3천만 원 날렸습니다. 그동안의 수고는 둘째 치고요". 임씨는 요즘처럼 경기가 얼어붙은 시절에는 차라리 복권이 희망이라고 말한다. 그는 복권이라도 몇 장 지갑 속에 지니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다며 씁쓸하게 웃는다. 임씨가 매주 1만원 어치 복권을 사는 데 실제로 투자하는 돈은 7,8천 원. 매주 2,3천 원 가량은 지난 주 당첨 복권을 그대로 바꾸기만 하면 된다.

얼마 전 받은 100만원의 상금 턱을 대신해 29일 사무실 직원 20여명에게 500원 짜리 즉석복권 한 장 씩을 돌린 회사원 장씨. 이름을 알려달라는 말에 그는 무척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만 복권을 이용한 상금 턱은 장점이 많다. 우선 주변사람들에게 공평하게 한턱 낼 수 있다. 게다가 복권을 받아든 이는 설명하기 힘든 행복감에 빠져든다. 감히 단돈 500원으로 누리기 힘든 행복을 맛보는 셈이다.

복권판매대 앞에서 삼삼오오 모여 복권을 긁어대는 여대생들도 눈에 띈다. 세계일주 여행을 꿈꾸는 그들은 누구든 당첨되면 모두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이미 약속을 해두었다. 중풍에 걸린 불편한 몸을 이끌고 1주일에 한번은 꼭 복권을 산다는 어느 할아버지, 그는 죽을 때가 되고보니 자식들에게 물려줄 게 아무 것도 없더라고 말한다.

복권판매대의 피크 타임은 저녁 시간을 훌쩍 넘긴 후이다. 밤 9시를 넘기면서 낮 동안 버스표나 신문을 찾던 손님들은 하나 둘 사라지고 복권을 찾는 손님들이 늘어난다. 이때쯤 복권 판매대를 찾는 사람들은 취기에 다소간 다리를 휘청거리기 일쑤인 퇴근길의 직장인들. 몇 잔 마신 술에 감상적으로 변한 직장인의 퇴근길엔 복권이 큰 위안이 된다.

지난 96년 주택 복권 1등에 당첨된 이모씨. 그는 복권을 잡고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혹시 번호를 잘못 본 것은 아닐까 싶어 수십 번도 더 확인했다고 말한다. 당시 1등 1억5천만원, 세금 22%를 떼고 1억1천600만원을 받았다. 그에게 복권은 갖가지 곤란을 한 번에 해결해 준 해결사였다. 두 아들을 결혼시켰고 작은 집도 한 채 마련했다.

복권에 별 흥미가 없는 사람들도 꿈이 심상찮다 싶으면 복권을 사기 십상이다. 현대 모비스가 며칠 전 직원 400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길몽을 꿨을 때 78%가 복권을 사겠다고 응답했을 정도다. '돼지꿈=복권당첨'의 등식은 여전히 법칙으로 존재하는 셈이다.

비판이 끊이지 않지만 복권은 서민의 찌든 삶에 숨통을 터주는 청량제임에 틀림없다. 권력도, 재산도, 별다른 재능도 갖지 못한 채 생활에 휘둘리는 소시민들에게 복권 당첨은 역전 홈런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나 '복권 당첨=행복'은 아직 법칙으로 자리잡지 못했다. 복권 당첨 후 더 불행해졌다는 많은 사람들의 증언은 그 홈런이 '끝내기 홈런'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듯 하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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