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부시 대통령이 동북아시아, 한국과 중국, 일본을 다녀갔다. 1월 29일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이라크, 이란과 함께 '악의 축'이라고 공격하면서 이제라도 전쟁이 터질 것 같은 노기에 가득 차 있던 미국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찾는다고 하니 그야말로 한국의 조야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을 떠나기까지 우리에게 '북한 정권은 투명하지 않고 주민들의 굶주림을 방치하고 있으며 대량살상무기를 계속 만들어내고' 있어서 '우려'를 표명한 것이고 전쟁이 아니라 대화를 원한다고 거듭 천명해서 당장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태풍일과(颱風一過)라고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북한에 대한 그의 생각을 분명하게 말했고 미국은 언제 어디서나 북한대표와 만날 용의가 있다고 하면서 이제 공은 북한 쪽에 넘어갔다고 했다. 북한이 미국의 공을 받아서 어떻게 다시 던질 것인가. 그것을 위해서 한국정부는 어떠한 노력을 해야하는가.
이것이 부시 대통령이 우리에게 남기고 떠난 긴급한 과제임은 두말 할 것 없다. 이러한 실제적인 과제를 넘어서 그것과는 약간 차원을 달리하는 최소한 두 가지 문제를 그는 우리에게 던져 주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2000년 6월 15일 남북 정상이 공동성명을 발표했을 때 강하게 의식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외세에 의해서 분단된 조국, 그리고 심지어는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치러야 했던 이 민족이 이제 외세가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화해 협력 통일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감격이 우리에게 있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점점 희박해져 갔고 다시 남북이 대화를 하고 평화를 추구하려고 한다고 해도 그것은 미국의 압력이라는 외세에 의해서 강제되는 것인가 생각하면 퍽 슬퍼진다.
부시 대통령은 중국에 가서도 중국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고 했다니, 이것 역시 외세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리하여 앞으로 한반도에 있어서 어떤 정세의 호전이 있다고 해도 그 모두가 외세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안타깝기 짝이 없다.
우리는 왜 반세기가 넘는 동안 그 많은 쓰라린 경험을 하고서도 아직도 같은 민족이라는 차원에서 툭 터놓고 "내 가족 내 민족이 서로 만나야지요, 우리는 이렇게 식량이 부족하고 이런 도움이 필요해요" 라고 말하지 못하는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쳐서 강대한 제국의 힘 앞에서 민족이 분열된 채 힘을 발휘하지 못하던 체질을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인가.
남북 관계에 있어서만 그렇다고 할 수 없는 데 또한 우리의 슬픔은 더해가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이냐 평화냐 하는 위기가 온다고 해도 남쪽 한국에서도 그러한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추악한 대립만 일삼고 있다면 더욱 한심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부시가 우리 남한에 던지고 간 공을 앞으로 정권교체를 향해가면서 어떻게 받아서 다시 돌려줄 것인가.
여기에서도 민족의 위기를 아랑곳하지 않은 지난날의 이 나라 역사가 되풀이 될 것인가 하는 염려를 떨쳐버릴 수가 없다. 머지않아 3.1 독립선언 83주년을 맞을 것을 생각하니 더욱 이런 괴로움을 되씹게 된다.
부시가 남긴 과제로서 한가지만 더 지적하기로 하자. 21세기를 맞으면서 얼마동안 우리는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협력을 강조하고 동북아시아 공동체마저 꿈꾸려고 했다.
그러나 부시의 내한으로 모두가 미국과의 관계를 중심 축으로 삼으려고 하고 한.중.일의 횡적 관계가 희박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날 동북아시아로 거대한 서구의 힘이 밀려 오던 때를 여기서도 되새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3.1 독립선언은 목마르게 '동양평화'를 갈구했던 것이 아닌가.
부시대통령의 이번 동북아시아 방문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 전체에 참으로 많은 과제를 남겨 주었다. 이것이 앞으로 이 지역에 태풍을 몰아오는 일이 없기를 기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지명관 한림대 일본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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