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진덕규칼럼-정치가에 걸었던 환상들

별로 좋지 않는 이야기지만, 나는 정치가를 잘 믿지 않는다. 정치가가 되기 이전의 그 개인에 대해서는 높은 인격과 진실성을 평가할 수 있지만, 정치가가 되고 난 뒤에는 어쩐지 신뢰감을 주기에 겁부터 집어먹게 된다.

이렇게 되기까지 정치가에 걸었던 기대감이 몇 차례 무산되었던 개인적인 경험 때문인 것 같다. 어릴 때만해도 정치가에게 나는 한없는 기대를 걸고 살았다. 지금 생각해도 입가에 웃음이 배어 나올 정도로 정치가에게 경도 되었으니 말이다. 1955년 5월의 일들도 그러한 현상의 하나였다.

아직 세상 물정을 몰랐던 그 나이에 고만고만한 학교에다 학적만 걸어두고서는 몇 푼의 돈벌이에 정신없이 뛰어 다니면서 살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간혹 읽게 되는 신문에서 야당인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신익희가, 부통령 후보로는 장면이 출마했다는 것을 알았다.

괜히 신이 났다. 신익희 선생이 꼭 대통령이 되어야 할 것 같고 그렇게만 되면 등록금을 내지 못해 교실에서 쫓겨 나는 일이 되풀이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그 보다도 당장 끼니 걱정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고, 헐벗은 산야에서 기근에 허덕이는 고향 사람들에게도 생기가 돌것만 같았다.

나는 신문에서 신익희와 장면의 사진을 가위로 정성스럽게 오려서는 내가 기거했던 방 책상 위쪽 벽에다 멋있게 붙여 놓았다. 꼭 대통령이 되어야 하고 되고 말 것이라는 믿음 같은 것이 확신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는 그 사진은 나의 확신의 무게를 점점 더해주었다.

그런데 그날, 5월 5일 아침 한 장의 호외를 읽게 되었을 때 나는 갑자기 하늘이 새카맣게 보였고 저절로 고함을 내지르게 되었다. "해공 신익희 선생이 돌아가셨다". 그 호외는 신익희 선생이 새벽 5시 반경에 뇌일혈로 기차 안에서 급서 했다는 보도였다.

집을 나설 때만해도 나는 벽에 붙은 사진을 보면서 전전날 그러니까 5월 3일 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신익희 선생의 정견 발표장에 참가하지 못했던 미안함에 젖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강 백사장의 정견발표에 무려 30만명 이상의 서울사람들이 모였다는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참여하지 못한 나의 죄송함이 아쉬움으로 상쇄되고 있었다.

그날 오후 우리 지방에 마련된 해공 신익희 선생의 빈소를 부리나케 찾았다. 이미 긴 행렬을 이룬 문상객들 속에 섞여 해공의 영정 앞에 다가 섰을 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정말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눈물은 목놓아 우는 사람들 틈에서야 소리낼 수 있는 기회를 맞을 수 있었다. 그날 밤늦게 빈소에 서성대다가 집에 왔을 때 나의 교복 왼쪽에는 검은 천으로 된 만장이 달려 있었다.

그처럼 순수했던 정치가에 대한 크나큰 기대감이 무너져 내린 것은 어쩌다 내가 정치학, 그것도 한국현대정치사를 공부한답시고 이 책 저 책을 뒤진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 그 많은 정치가들 때문에 밀렸던 나의 등록금이 해결되지는 않았다.

고향 사람들이 하루 세끼 거르지 않게 된 것은 절대로 정치가들과는 무관했다. 아마 정치가들의 약속만 믿었다면 나는 끝내 학교를 마칠 수 없었을 것이고, 고향사람들도 배고픈 아픔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해공 신익회도, 운석 장면도 그저 그런 정도의 정치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정치가들의 언변과 실없는 약속에 최면 걸려서는 그들의 포로로 전락된 그 시절이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그런데도 채워 질 수 없는 공허감 같은 것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젊은 날의 정치에 대한 지나친 환상이 무능한 정치가에게도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질 수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그들에 대한 부질없는 환상을 걷어낼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텅빈 공허감을 메울 참 정치가를 맞게될 지도 모르겠다. 이제 환상도 기대도 갖지 말아야 할 이 나이에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또 다른 환상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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