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삶-중고 오디오 그때의 그 선율에 푹 빠져

지하철 대구역 뒷골목에 가면 '고물창고'가 있다. 집에서 쓰다 내다버린 유행 지난 물건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장소다.

온갖 잡동사니들 속에서 눈 밝은 사람이면 제법 쓸만한 물건도 건질 수 있는 곳. 이 곳에는 물건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모인다. 뭔가 색다른 게 없나 찾아다니는 사람들….

그중에는 중고 오디오 수집에 목숨 건(?) 사람도 많다. 비슷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십수년 이곳을 들락거리다 뜻을 모아 모임을 만들었다. 온갖 사연과 애환이 녹아 있는 중고물건들이 교통하고, 이제 사람도 교통한다.

'다(多).소리회'. 40, 50대 중고 오디오 애호가들의 모임이다. '고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난해 7월 이 모임을 만들었다. 회원들이 '보물창고'라고 부르는 이곳 고물창고를 출입하면서 안면을 튼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게 된 것이 계기. 이제 회원도 27명에 이른다.

직업도 다양하다. 교사, 공무원, 주부, 건축가, 자영업자 등. 회원들 모두 오래된 오디오 기기에 관심이 많다. 특히 60,70년대 유행했던 전축이나 앰프, 스피커, 슬라이더, LP음반 등 보통 사람들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고물들을 이들은 마치 신주단지 모시듯 애지중지한다.

회원들 모두 진공관 앰프와 트랜지스터를 체험한 세대들이다. 진공관이 만들어내는 따뜻한 소리가 이제 흰 머리에 주름잡힌 모습의 중년들에게 지난 시절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나 스키트 데이비스, 엘비스 프레슬리의 멜랑코리한 노래가 여전히 귓전에 맴돈다. 먼지 먹은 중고기기들을 값싸게 구입해 닦고, 수리하고, 추억의 명곡들을 감상하면서 가끔씩 옛 생각에 잠겨보는 것이 이들의 낙이다.

지난 90년대 초까지만해도 칠성시장 인근 푸른다리 주변에 고물시장이 형성돼 있었다. 하지만 신천대로 건설로 인해 상인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가전제품을 취급한 노점들이 지하철 대구역 뒷골목으로 옮겨오면서 '다.소리회' 회원들도 이 골목으로 발길을 옮겨왔다.

비슷한 사람끼리는 으레 통하기 마련. 그동안 축적해온 노하우와 정보를 서로 주고받고 소장품에 대해 품평까지 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뜻에서 모임이 시작됐다.

회장 박판수(57.남구청 위생과)씨는 "60, 70년대 오디오 제품들이 우리 귀에 가장 익숙하고 여전히 정감이 넘친다"며 "음향 데이터상으로는 요즘 나온 고가의 하이엔드 제품이 우수하지만 다소리회 회원들은 그때 음악과 그때 물건들을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모였다"고 모임을 소개했다.

모임의 명칭도 특정 음악만 고집하지 않고 팝, 가요, 클래식, 국악 등 장르 구분없이 골고루 들어보자는 의미에서 다(多) 소리로 정했다.

다.소리회 회원들은 매월 한두차례 모임을 갖는다. 장소는 봉덕시장 인근의 총무 박경규(봉덕3동 새마을금고 이사)씨의 스튜디오. 살림집을 아파트로 옮기고 대신 스튜디오로 꾸민 이곳에는 지난 20여년동안 박씨가 발품을 팔아 모았던 애장품들이 그득하다.

60년대 월남전 당시 국내에서 가장 큰 인기를 모았던 소니 전축에서부터 JBL스피커, 방송국용 릴 데크, 매킨토시 앰프 등 없는 것이 없다. 회원들이 함께 음악을 즐기고 소스나 새로운 정보를 교환하는 공간이다. 서로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교환하기도 하고, 짝을 맞춰 나눠 갖기도 한다.

또 그동안 혼자서만 알아온 오디오 지식을 함께 공유하는 연구발표회도 갖는다. 고장난 제품을 들고오면 십수년 물건을 만져온 총무 박씨가 익숙한 솜씨로 수리, 희한하게도 제 소리를 다시 만들어 낸다.

이 모임에는 모토가 있다. 듣는 즐거움, 만지는 즐거움, 보는 즐거움 등 삼락(三樂)이 그것. 그래서 회원들은 음악을 듣는데 많은 돈을 투자하지 않는다. 그저 좋아하는 음악이 있으면 그뿐. 값비싼 오디오에 집착하지 않는다.

여성회원인 김옥례(50.주부)씨는 "처음 아무것도 모를때는 알게모르게 비용이 들었지만 어느 정도 지식과 경험이 쌓이니까 몇 만원 들이지 않고도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눈과 귀가 열리더라"며 올드 예찬론을 편다.

쓰레기 종량제를 실시할 무렵 회원들은 톡톡히 재미를 봤다. 집집마다 오래된 LP음반들을 길거리에 버려놓았기 때문. 직접 수거하거나 고물상에 부탁해 값싸게 구입하기도 했다. 요즘은 보기도 힘든 음반들이 덩굴째 굴러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60,70년대 중고 오디오 제품이나 음반을 보기가 이제 힘들어졌다.

가격도 올라 선뜻 손을 내밀기가 쉽지 않다. 회원들은 서울의 청계천이나 외국의 벼룩시장처럼 쓰던 물건들을 사고 파는 공간이 아쉽다며 이같은 공간을 활성화하고 명소로 만들기 위한 행정적 지원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박판수 회장은 "이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씩 거쳐야 하는 시간적, 금전적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 모임의 큰 장점"이라고 소개했다.

취미가 같은 사람들이 모여 친목을 다지고 좋아하는 음악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다.소리회'. 있는 그대로를 즐기고 만족하는 그들의 삶의 철학이 부럽기만 하다.

서종철기자 kyo425@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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