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진덕규칼럼-토끄빌을 생각하면서

우리 나이의 사람들은 대학에서 별로 배운 것이 없다. 그러면서도 한가지 위로는 참 좋은 선생님들이 계셨고 '사상계'가 있었다는 점이다. 매달 '사상계'가 나올 때쯤이면 몇 번이고 책방에 들러 이번 호에는 어느 선생님 글이 게재되었는지를 알고 싶은 충동에 젖어 있었다. 그렇게 해서 민석홍, 이극찬, 차기벽, 이만갑 교수님 등의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사상계'에서 얻어들은 이름의 하나가 토크빌이었다. 우연히 듣게 된 그 이름은 참 이상했다. 그 토크빌과의 대면, 그러니까 그의 책을 접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뒤였다. 어찌 어찌 해서 읽은 책 중에 토크빌의 '미국민주주의론'이 들어 있었다. 그러다가 그 책을 본격적으로 다시 읽게 된 것은 로버트 벨라의 '마음의 습속' 때문이었다.

벨라는 미국의 공동체와 공리적 개인주의를 말하면서 이를 토크빌의 '미국민주주의론'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 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단순히 정치 제도만이 아니라 삶의 양식이고, 그것도 이웃과의 인간적인 연대를 이룩하는 공공성에 바탕을 둔 '공동체적 정치'임을 알 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 나라에서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선거로 뽑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알려지고 있었다. 길거리나 대학에서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외쳤으며 그 주장은 국민 직선의 대통령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피나는 투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그리나 곧 민주화와 민주주의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민주화를 이룩하기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는데도, 그렇게 해서 얻어진 그 민주화는 결과적으로 몇몇 투사들의 '군림'만을 가져왔다.

민주주의 세상이라면서도 여전히 전화는 도청되었고 권력자 주변의 부정과 부패는 만연되고 있으며 국가 권력은 사유화되었고 지역감정이 판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자연스럽게 토크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다.

토크빌은 프랑스 혁명의 후반기를 반영한다. 그는 1805년 7월 29일 파리의 귀족가문 출신이었지만 왕당파는 아니었다. 그는 분노하는 지식인으로, 냉철한 비판자의 위치를 고수했다.

이러한 토크빌의 태도는 베르사유 재판소의 판사라는 그의 직업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민주주의의 본질을 찾기 위해 미국으로 여행하게 되었던 것도 프랑스 혁명 이후의 정치적 절망감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1831년 5월 미국 보스톤 근처에 닿게 되었고 1년 동안 미국 곳곳을 여행한 결과를 책으로 저술한 것이 앞에서 말한 '미국민주주의'였다.

토크빌은 미국 촌락에서 주요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자유롭게 토론하는 모습을 바라보았을 때 민주주의는 곧 자치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모임에서는 논박이 아니라 토의가, 비난이 아니라 비판이 주도하고 있었다.

대표자를 선출했지만 그는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했다. 그 당시 미국의 민주주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아름다운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곧 공공성을 중시하는 시민사회의 모습이었다.

토크빌은 미국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의 두 기둥이 종교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특별히 주목했다. 종교가 미국 사람들에게 '마음의 습속', 즉 개인적인 행동 원칙이 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평등한 존재며 귀중하게 대접받아야 한다는 믿음이 사람 사이에서도 실천되고 있었다. 이것이 정치로 이어졌으며,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기본 속성인 공동체적 연대성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토크빌의 민주주의론을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물음은 오늘 우리사회의 공동체적 연대성의 문제이다. 토크빌이 우리를 바라봤다면, 그는 '마음의 습속'이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비판했을 것이다.

민주주의와 선동성의 결합으로 조락의 계절을 맞고 있다고 경고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충고는 민주화와 민주주의 사이의 이중성으로 받아들여도 좋다. 민주주의를 위한 급선무는 우선 권력자들의 민주적 삶이다.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그들의 일상사가 민주주의의 걸림돌이 되는 묘한 상황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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