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방송국마다 역사극이 유행이다. 민초들의 평범한 일상보다 권력투쟁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이 때로는 현실정치와 비슷한 분위기와 맞아 떨어져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탓이란다. 사람은 오랫동안 같은 일에 얽매여 살아오다 보면 자기가 알고 있는 세상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 같다.
필자는 역사극을 시청하면서도 등장하는 여러 배경 중 엉뚱하게도 나무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그 자리에 있어야 할 나무인지 아닌지를 내내 곱씹어 보느라 정작 내용은 놓치기 일쑤다.
역사극은 당시의 상황 재현에 필요한 고증이 여러 방면의 전문가에 의하여 비교적 치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나무에 대한 고증만은 상식의 수준에도 훨씬 못 미친다.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처음 들여온 리기다소나무 밑에서 신라군과 백제군이 회전을 벌린다거나, 60년대에 심기 시작한 은수원사시나무를 배경으로 장수들의 칼싸움이 한창일 때도 있으니 말이다.
얼마 전에 끝난'태조 왕건'의 사저 앞마당에는 일본인 노무라씨가 단풍나무를 개량하여 만들어 낸 '노무라단풍(홍단풍)'이 봄부터 가을까지 붉은 단풍을 뽐내고 있었다.
영상세계에서 빠져나와 현실의 우리 문화유적지로 되돌아와서 보자. 경복궁과 창경궁을 비롯한 조선의 궁궐에는 플라타너스, 메타세쿼이아 등이 위용을 뽐내는가 하면 일본목련, 일본잎갈나무, 화백 등 일본을 고향으로 하는 나무들도 여전히 푸름을 자랑하고 있다.
500년 조선왕조를 하루 아침에 멸망시켜버리고 민족의 현대사를 질곡으로 몰아넣게 한 바로 그 나라를 대표하는 나무가 광복 반세기가 지난 이 순간에도 우리의 정신적 지주인 궁궐에서 여전히 뿌리가 뽑히지 않은 셈이다.
홀대받는 토종나무
경남 통영시에는 이순신 장군 사당인 충렬사가 있다. 입구를 들어서서 오래 된 동백나무를 뒤로하고 중문과 마주하면 아름드리고목 4그루가 찾아간 참배객을 위압한다. 두 그루는 일본전나무이고 나머지는 미국에서 들여온 태산목이다. 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사당건물의바로 옆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지 않나 싶은 금목서란 나무가 자란다.
역시 일본나무다. 충렬사에는 이 외에도 유적지의 역사성에 맞지 않은나무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렇게 이순신 장군의 사당까지, 일본을 원산지로 하고 일본인들이 가장 아끼는 나무들을 버젓이 심어두고 우리 모두가 태평스럽다. 장군의 혼백이 혹시라도 후손들이 무슨 나무를 심어 놓았는지를 알고계신다면 매일 밤 꿈자리가 뒤숭숭하시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천년고도 경주에도 나무 오염문제는 예외가 아니다.
불국사에는 입구부터 히말라야시더가 독특한 가지 뻗음을 자랑하고 경내로 올라가면 역시 플라타너스, 화백을 비롯하여 계곡에는 아카시나무까지 주위의 다른 우리 나무들을 오히려 압박해 가고 있다. 태종 무열왕릉에는 일본목련이 봉분을 마주하고 심겨져 있어서 찾아간 관람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더욱이 시내의 가로수는 은단풍, 중국단풍, 튤립나무 등이 대부분이라서 이름으로보아서도 경주의 역사성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나무들만 찾아서도 '신라의 거리'를 만들 수 있을 터인데, 사정이 이러하니 안타까움이 더 한다.
외래나무 오염심각
우리의 문화유적 현장에 오염되어버린 나무의 예를 몇 가지 들어 보았다. 어떤 나무든 이 땅에 뿌리를 뻗고 살고 있으니 우리 자연의 일부로봐버리면,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세상살이에 우리나무 일본나무 미국나무하고 따질 필요는 없다고 할지 모른다. 나아가서 나무는 나무로서 아끼고 사랑하면 그뿐이지 세계화를 외치고 있는 마당에 웬 '나무 국수주의'냐고 생각의 편협함을 탓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의 문화유적지만은 나무 하나 풀 한포기까지 모두 토종으로 만들어 두는 데 한 치의 소홀함이 있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연의일부로서 선조들이 바라본 '그때 그 나무'의 느낌 그대로가 가감 없이 우리에게 전해질 때, 비로소 조상의 얼이 우리 것으로 녹아 들 수 있기 때문이다.
박상진(경북대 교수.임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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