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월드컵에 푹빠진 여성 축구팬들 열정도 남자 못잖아요

종반으로 접어든 2002 한.일 월드컵. 국가의 명예를 걸고 한 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는 격전장, 그 그라운드를 누비는 선수들의격렬한 몸싸움, 그리고 한순간 감동의 물결로 번지는 골 세리머니….

남성적 묘미가 물씬한 축구경기에 여성 팬들의 열정이 어느때 보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주요 경기는 아예 TV채널 고정이다. 여성들에게 옮겨 붙은 축구사랑은 비록 남성처럼 직접 운동장에서 뛰지는 못하지만 대신 월드컵 패션이나 소품으로 축구를 간접 경험하는 열성파가 늘어나게 한다.

전 국민이 붉은 악마 응원단이라해도 과언이 아닌 요즘 여성들의 축구사랑은 어디까지인지 속내를 살짝 들여다 본다."월드컵 한국전 경기가 열릴때마다 두류공원 야외음악당으로 달려가 붉은 악마 응원 대열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한국 축구가 8강,나아가 4강까지 쑥쑥 올라갔으면 좋겠어요".

회사원 피양숙(35.대구시 달서구 용산동)씨는 요즘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축구 생각만 하면 가슴 뿌듯한 흥분이 온몸을 감돈다. 조기축구회 회원인 남편을 평소 못마땅하게 생각했던데 대해 미안하다는 생각도 든다. 붉은 티셔츠를 입고 응원장으로 갈때는 마음이붕 뜨면서 축구에 홀딱 빠진 자신이 꼭 마니아가 된 기분이다.

예전 A매치 국가대항전 정도나 슬쩍 눈길을 줬다는 피씨는 요즘 유럽 유명스타들의 이름도 줄줄 꿴다. "잉글랜드의 베컴과 오웬, 이탈리아의 델 피에로 등 화려한 기술까지 겸비한 미남스타들의 플레이를 보는 재미도 그만"이라며 "지금부터 적금을 들어 4년뒤 독일 월드컵을 보러가자고 남편에게 제안했다"고 귀띔한다.

축구경기 중계시간만 되면 혈압이 올라갈 정도로 축구광이 됐다는 서은란(42.대구시 북구 읍내동)씨의 축구사랑도 대단하다.경기장이나 응원장으로 직접 달려가는 것은 아니지만 서씨도 누구못지 않은 월드컵 축구 팬이 됐음을 자랑한다. "갑작스런 변화에 남편이 어리둥절해 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온 가족이 함께 응원을 하다보면 가족간의 일체감 뿐 아니라 새로운 정도 새록새록 돋는 것 같다"고 축구 예찬론을 펼친다.

'히딩크 감독이 갑자기 섹시해 보인다'는 문자 메시지를 친구들에게 연신 보낼 정도로 히딩크의 팬이 됐다는 성진아(27.구미시 형곡동)씨는 집에서 TV 중계를 보기보다는 주저없이 구미 시민운동장으로 달려간다. 히딩크 감독 특유의 '어퍼 컷 세리머니'가 전광판에 비쳐지면 한국팀이 승전보를 알리는 날. 스타 감독의 자신감 표현에 때로는 자신도 모르게 전율하기까지 한다고 말한다.

"조마조마한 마음에 눈을 가리다가도 어느 순간 번개처럼 결승골이 터지는 축구경기의 짜릿함은 단순한 흥분을 넘어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리는생활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며 "월드컵 개막 전만해도 해트 트릭이니 발리 슛이니 하는 축구용어나 규칙을 제대로 몰랐으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이젠 오프사이드, 골든 골 등 같은 용어를 친구들에게 설명해 주는 입장이 됐다"고 말한다.

생활체육 축구연합회 허만경(47) 사무국장은 "현재 수성구, 동구, 달서구 등 3개 구에 불과한 대구의 여성축구단이 이번 열풍을 타고 각 구마다 창단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면서 여성축구 동호회의 발전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대구가톨릭대 성한기 교수(사회과학부 심리학 전공)는 "그동안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정의 발산 기회가 적어 내적인 에너지를 억눌러 오던 여성, 특히 주부들이 월드컵이라는 국가적 이벤트를 맞아 그 열정이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것으로 보인다"며 "여성들에게 인기가 별로였던 축구가 한국팀의선전을 바라는 애국심에다 남성적인 축구가 뿜어내는 다이내믹한 묘미가 여성들이 축구에 열광하게 만드는 상승작용을 일으킨 측면이 있다"고 풀이했다.

노진규기자 jgroh@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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