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두 모금만 마셔도 바로 목숨을 잃게 되는 독가스. 불만 나면 이런 치명적인 가스를 대량 내뿜을 '잠재 가스탄'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그런데도 소방법은 여전히 이를 모른 체하고 있다.
안전불감증이 우리의 고질병이라지만, 핵폭탄은 두려워하면서 독가스는 예사롭게 생각해 버리는 불균질성은 결국 목숨을 대가로 요구하고 있다.
◇얼마나 무서운 독가스 배출되나?=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전문기관이 특정 제품에서 나오는 유독가스 성분을 공식 분석한 사례조차 없다.
그러나 플라스틱·화학섬유류 등에 불이 붙었을 때 발생하는 독가스는 시아니드·아황산가스·암모니아·이황화탄소·불소·염소·시안화수소·황하수소·포스겐·할로겐·일산화탄소 등으로 지목돼 있다.
그 중 염소는 2차 세계대전 때 유태인 학살용 독가스로 쓰였던 것이다. 시안계 가스는 일본 옴 진리교 광신자들이 지하철에 살포해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물질. 포스겐 가스는 인명 살상용 화학무기를 만들 때 사용되는 것이다.
이런 가스들은 극소량이라도 흡입되면 신경마비와 호흡장애를 일으킨다. 가스 중 일부는 불길이 없어도 '화학 화상'을 일으킨다. 화염과 함께 기도를 통해 들어가면 화상이 가속화된다. 일부 가스는 신경에 직접 작용해 의식·운동 관련 신체기관을 마비시켜 버린다.
독가스가 함유된 연기는 초당 평균 수평으로 0.5~0.8m, 수직으로 3~5m씩 확산됨으로써 주위에까지 피해를 입힌다. 건물 화재 때도 흔히 옛날의 목재 주택 화재만 연상해 불길이 가장 두려운 대상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라진 것이다.
◇무엇이 독가스를 생산하나?=주위에 가장 흔한 것은 합성수지류이다. 실내장식이 고급화되면서 갈수록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것.
술집·호텔은 물론 가정집에서까지 널리 쓰이는 실크·필름형 벽지에서부터, 원목 느낌이 나게 하는 각종 PVC계 바닥재들은 모두 치명적인 독가스를 방출하는 합성수지류이다.
시공이 편하고 가격이 싸 많이 쓰이는 '샌드위치 패널'도 합성수지류이다. 더욱이 그 속에 넣는 스티로폼은 100℃만 되면 불이 붙어 인화에 불과 몇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오히려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것. 1천℃ 이상 돼야 불이 붙을 수 있어 인화에 몇 분 걸리는 나무와는 큰 차이가 난다. PC방·레스토랑 등에 쓰이는 우레탄폼은 연소 때 아황산가스 같은 독가스를 배출, 대규모 인명피해의 주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때문에 건교부는 지난해 "불연재로 인정될 때만 샌드위치 패널 시판을 허용하겠다"고 입법예고 했지만, 관련 업자들의 강력한 반발로 법 시행이 계속 지연되고 있는 실정이다.
위험한 재료라도 방염처리 됐으면 괜찮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벽지 등에는 불 붙는 속도를 지연시키도록 방염제 사용을 의무화해 놓고 있다. 그러나 방염처리된 제품도 검증 부실로 안심하기 힘들다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방염제 검사를 담당하는 한국소방검정공사 조남형 연구원은 "극히 소량의 시료만 검사하다 보니 전반적 방염 효과는 미지수"라고 했고, 대구 동부소방서 홍말석 진압대장은 "방염처리된 벽지·카펫에 불을 붙여보면 금방 타 버리는 경우가 많다"며 "방염제로 피해를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은 오산"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큰 불이 나면 방염제 자체에서도 독가스가 방출된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했다. 브롬 성분이 들어 있어 방염제 자체가 불타게 될 경우 치명적인 할로겐 가스가 대량 발생하게 된다는 것. 조 연구원은 "그런데도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선 방염제의 유독가스 검사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선진국은 어떻게 하나?=선진국은 합성수지를 철저히 규제한다. 미국의 경우 각종 가연재의 일산화탄소·이산화탄소 양을 측정해 등급을 부여하고, 플라스틱 제품은 벽과 천장 면적의 10%를 초과할 수 없도록 한다. 또 화염 확산속도 및 열 방출량 관련 규제를 하고 있다.
프랑스는 화재 시험을 거쳐 플라스틱 제품에서 나오는 독가스량을 ㎥당 질소는 5g, 염소는 25g 이하로 규제하고 있다. 영국도 플라스틱류 제품은 반드시 인화성 시험을 거치도록 의무화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재의 발열량, 기준온도 초과 정도, 태웠을 때 쥐 치사 여부 등과 관련한 실험만 하고 있을 뿐, 연기 유독성 평가의 기본이 되는 단위 가연물당 가스 생성 비율 등에 관해서는 정확한 실험조차 전무한 실정이다. 중국만 해도 2개 연구소당 각 석·박사급 100명 이상이 합성수지류 독가스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지만 한국엔 전문 연구소조차 없다고 관계자들은 말했다.
이상준기자 all4you@imaeil.com
▶도움말 주신 분=한국소방검정공사 조남형·김해영 연구원, 한국소방안전협회 연구소 김영근 부장, 화재보험협회 방재연구원 소화연소팀 이지석 과장, 대구 서부소방서 임동권 진압대장, 대구보건전문대 최영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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