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손숙칼럼-아름다운 가게

얼마전에 이사를 하려고 짐을 들어냈을 때의 일이다. 살림을 좀 정리해야지 늘 벼르기만 하면서 뭐가 그리 바쁜지 미루기만 하다가 부득이 짐을 들어 내놓고 보니 스스로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이들 모두 결혼시키고 식구가 줄면서 살림도 가능한 대로 줄이고 단순하게 살아야지 결심한 게 여러번인데 도대체 무슨 살림이 또 이렇게 불어났단 말인가.

부엌은 부엌대로, 안방은 안방대로, 거실, 베란다, 신발장, 욕실 등에 가득찬 살림들을 보면서 참 속상하고 나 자신에게 실망했다. 미처 버리지 못한 살림살이들, 혹시나 해서 두었던 옷가지들, 충동구매로 사들인 별 필요없는 물건들이 쌓여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난감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특별히 물건에 욕심이 과하다거나 쇼핑 중독증 환자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느집이든 아마 이런 고민은 있다고 생각한다. 물건이 쌓여서 정리도 할 수 없고 나중에는 쓸데 없는 잡동사니 살림살이에 짓눌려서 골치가 아팠던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세상에 물건이 너무 넘치게 많다. 심지어 추석이나 설이 되면 고속도로 주변에 멀쩡한 살림살이들이 버려져 있어서 청소하는 분들이 골머리를 앓는다는 뉴스도 심심찮게 들린다. 그런데 왜 우리는 나누는 일에 인색하고 무관심한 것일까.

12월이 되면 자선 냄비가 등장하고 곳곳에서 어려운 이웃을 돕자는 표어가 나붙지만 그때만 반짝할 뿐 대체로 나누는 일에는 무심한 편이다. 아직 기부하는 문화가 뿌리 내리지 못해서이기도 하고, 쓰던 물건을 어떻게 남을 줄 수 있나 하는 정서가 보편적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얼마전에 서울에서는 '아름다운 가게'라는 작고 예쁜 가게 하나가 종로구 안국동에 문을 열었다. 자신에겐 쓰이지 않고 필요없는 물건들을 기부받아서 그것들을 쓸 수 있게 손질해서 되파는 가게다.

그곳에서 생기는 이익금들은 전액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쓰여진다. 이 가게를 준비하고 문을 여는 과정에서 우리는 너무나 많은 작은 기적들을 경험했다.

가게를 싸게 임대해 주겠다는 분이 계시는가 하면 헌옷들을 깨끗하게 무료로 세탁해 주겠다는 분도 계셨고 아무런 보수 없이 자원 봉사를 하겠다는 분도 계셨다. 기부받은 물건들을 모아둔 창고에 가보면 날마다 즐거운 일들이 몇 번씩 일어난다.

기증받은 헌 구두를 새것처럼 고치고 손질해 주겠다고 70대의 할아버지 한 분이 찾아오셨을 때는 그곳에서 일하던 자원봉사자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가 났었다. 평생 헌 구두를 고쳐서 자식들을 먹이고 가르쳐온 그 할아버지는 당신이 갖고 계신 그 귀한 재주를 이제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겠다고 스스로 찾아오신 것이다.

이제 이 '아름다운 가게' 1호점이 자리를 잡으면 우리는 전국에 2호, 3호, … 100호의 가게들을 만들어서 나에겐 필요없는 물건들이 쓰레기가 되지 않도록 고치고 다듬어서 재활용하고 남은 이익금을 사회에 환원할 것이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일은 생각해보면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먼저 아름다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조금씩 내가 가진 마음을 나누기만 하면 그게 바로 아름다운 세상인 것을.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화라는 말도 바로 그런 뜻이 아니겠는가.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 사람의 질을 높이는 게 문화라면 문화는 정치, 경제, 사회의 뿌리인 것이다.

이번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분들도 이렇게 문화의 중요성을 안다면 한결 멋진 선거가 될 수 있을 텐데 선거 풍토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안타깝다. 그래서 이제는 어떤 경우에도 정치, 경제, 사회, 교육, 그리고 문화는 구색맞추기로 뒷부분에 겨우 끼워주던 형태에서 벗어나 문화가 제일 첫 번째 순서로 거론되었으면 한다. 이번 선거에는 어떤 후보가 어떤 문화정책을 내놓았는지 꼼꼼하게 따져봤으면 좋겠다.

(연극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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