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현장2002-대선 맞은 선관위

오전 8시 사무실 도착, 8시~8시30분 후보 동향 및 유세 일정 파악 위한 각 정당 홈페이지 방문 및 지구당과 전화통화, 8시31분~9시 아침 회의 참석, 9시~9시10분 자원봉사 부정선거감시단 배치, 9시11분~10시30분 각종 서류 처리, 11시 범어동 인동장씨 대종회 사무실 방문, 13시30분~14시 대구MBC 앞에서 열린 WTO 반대·식량주권 사수·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대구·경북대책위 100인 동시다발 1인 시위 참관, 14시10분~15시30분 동구 신천동에서 열린 무소속 장세동 후보 대선 출정식 참관, 16시~16시20분 장세동 후보의 인동장씨 대종회 사무실 방문에 동행, 16시30분~17시30분 서문시장 방문한 장세동 후보 감시 활동, 18시 사무실 도착. 23시30분 퇴근.

대구시 수성구 선거관리위원회 지도계 민병주(34) 주임의 토요일이었던 지난달 30일의 일과다. 지도계 최고 '졸병'으로 2001년 7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지난 2월 발령받은 민씨는 노총각. 결혼이 바빠 자주 애인을 만나 구슬러야 하지만 요즘에는 얼굴 보는 시간 내기도 힘들다. 그래서 짬이 날 때마다 전화기를 든다. 어떨결에 치러낸 6·13 지방선거 뒷마무리도 아직 완전히 덜 됐는데 대선이 시작된 것이다.

지난달 26일 후보등록을 시작으로 대선 득표전이 본격화되면서 선거관리 및 부정선거운동 감시를 담당하고 있는 선관위 직원들의 움직임이 바빠졌다.후보자가 많은 지방선거보다야 덜 바쁘지만 대선 기간인 요즘 자정이 넘어 집에 들어가는 것이 예사다.

민씨는 "올해는 유난히 선거가 많네요. 6월엔 지방선거가, 7월엔 교육위원 선거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대선까지 있으니. 올해가 역사상 선거가 가장 많은 해가 될 것입니다. 매년 올해 같으면 평생 장가 들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민씨의 직속 상관인 서상국(47) 지도담당도 민씨와 다르지 않다. 선거기간이 시작되고는 자정 전에 집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사무실에 들어와 뒤처리하다 보면 자정은 쉽게 넘깁니다".

수성구 선관위 전체 직원은 일용직 3명을 포함해 모두 11명. 공공근로자 1명과 임시 증원된 공익요원 6명이 이들의 업무를 거든다. 불법 선거운동감시에는 자원봉사자 48명이 하루 3교대로 움직이는 부정선거감시단이 나서고 있지만 대선후보가 직접 지역을 방문하면 정규 직원들도 대부분 현장으로출동한다.

5일 현재까지 단속실적은 신분증을 착용않고 어깨띠를 두른 2건을 적발, 과태료를 부과했고, 무자격자 선거운동 등 3건은 조사 중이다. 달랑 여직원 한사람뿐인 계원과 보조요원들을 데리고 각종 서류와 투·개표 용품 등을 준비·점검하고 있는 대구시 중구선거관리위원회 관리계 조종영(44)계장은 코에서 단내가 난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에 짜증이 나기도 한다. "하루 종일 정신 없이 움직이다 집에 가면 너무 피곤해서 잠도 잘 안옵니다".

선관위 직원들이 가장 곤혹스러울 때는 후보자 측에서 편파단속이라며 항의할 때. "선거 막판이 되면 목 좋은 곳에는 각 후보 진영이 한꺼번에 몰려 득표활동을 하게 마련이죠.

운동원들이 명찰은 제대로 차고 있는지, 신고한 차량 이외에 차량을 동원하고 있지는 않은지 등을 가까이서 살필라치면 '왜 다른 후보보다 우리 쪽에 먼저 오느냐'며 이의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서 담당의 말이다.

불법 행위가 있었다는 심증은 가는데 물증을 찾지 못할 때는 약이 오른다. '불법 현장'에 있던 사람이 한마디만 해주면 처벌할 수 있는데 증언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좌절감을 느낀다.

이들은 선거기간 중엔 하루 24시간 비상대기 상태다.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 그래서 퇴근할 땐 사무실로 걸려오는 전화는 휴대전화로연결될 수 있도록 한다. 투표가 임박하면 사무실에서 밤을 보낸다.

선거를 앞두고 선관위 종사자들이 공통적으로 아쉬워하는 것은 아직도 돈 몇 푼에 양심을 파는 유권자가 있고, 경쟁 후보나 상대 정당을 깎아내리는데혈안이 된 구태의연한 정치풍토와 혈연·지연 타파를 내세우면서도 그것을 이용해 표를 얻으려하는 후보와 종사자들의 행태다.

수성구 선관위이주방(50) 사무국장은 "부정 선거자금 시비를 종식시키고 돈 안드는 선거를 정착시킬 수 있는 선거법 개정안이 정치권의 외면으로 채택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리고 선관위 직원들은 '선거가 없을 때는 놀고 먹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데 대해 아주 섭섭하다. 한 선관위 직원은 "우리들 사이엔 '선거 준비 6개월, 선거 마무리 반년'이란 말이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선거기간보다야 여유가 있지만 마냥 놀고 있는 것은 아니다"고 힘주어 말했다.

송회선기자 so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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