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10년 전. 지금처럼 대통령선거 유세가 한창일 때다. 그 당시 대통령 당선이 유력하던 김영삼 후보 부인 손명순 여사를 인터뷰 한 적 이 있다. 인터뷰 내내 손 여사는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은 일절 하지 않았다. 행여 말 한마디 잘못해 선거를 그르칠까 아예 입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서면으로 답을 받긴 했지만 )
그후로 10년. 요즘에는 아침방송에 후보 부인들이 나와 노래까지 불러제끼는 모양이다. 그래서 세상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도 들게 하지만 조금 들여다 보면 그게 아니다.
이회창 후보 부인 한인옥 여사는 사석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라며 답답함을 호소한다. 아들병역과 관련, '하늘이 두쪽이 나도' 발언 이후 공개적인 행사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행여 말실수를 해 후보의 표를 깎을까하는 우려 때문이다. 올해 신년인사때도 부엌에서 나오지 못했다. 밖에서 인사하기보다는 앞치마 두르고 부엌에 있는 한 여사의 이미지가 훨씬 괜찮겠다는 당의 판단에 그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후보 부인 권양숙 여사도 언론에 잘 나서지 않는다. 행사장에도 얼마나 굳어있는지 옆에서 보고 있는 사람이 목이 아플 지경이라고 한다. 얼마전 행사에서는 사전에 준비한 원고를 읽으며 몇줄을 빠뜨린 모양이다. 권 여사는 급히 "몇줄을 빠뜨려 다시 읽겠다" 며 애교있게 넘겨 오히려 청중들에게 더많은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그만큼 긴장되고 힘든 게 후보 부인이다. 지금은 후보가 아니지만 정몽준씨의 부인 김영명 여사의 활달하고 자유로운 성격과 비교가 돼 더욱 조심스러웠을 게다.
대통령후보부인. 그것도 한국의 후보부인은 힘들다. 나서면 나선다고 흉보고 너무 소극적이면 소극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번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 부인들이 소극적인 이미지로 중무장을 하고있는 것은 개인의 성향도 있겠지만 이희호 여사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상당히 작용한 듯하다.
후보 부인은 물론 공인이다. 그래서 전략이 필요하고 이미지 작업도 필요하다. 더구나 한 조사에서 대통령 후보 부인의 이미지가 대통령을 선택하는데 영향을 줄 것이라는 응답이 54.7%에 나 됐다. 그만큼 부인의 품성이나 활동이 중요한 변수가 되고있는 것이다. 당연하게 전략도 필요하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소극적이며 자신의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후보 부인에게 호감을 느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최근 모 방송사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사람들은 육영수 여사의 이미지에 힐러리의 이미지를 합친 대통령 부인을 원한다 고한다. 시대가 변한 것처럼 바람직한 대통령 부인상도 이렇게 바뀌었다.
미국의 경우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인은 일간신문에 '나의 하루'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실으며 자신의 생각을 당당히 드러냈다. 로잘린 카터는 내각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했고 마약추방 캠페인을 벌인 낸시 레이건, 힐러리 클린턴까지 대통령 부인의 위상과 역할은 점차 확대되었다.
여기에 비해 한국의 대통령 부인들은 뒤로는 할 일 다하며 겉으로는 다소곳한 척 소극적인 척하는 이미지를 가지려고 애써왔다. 그러나 이제는 '척하는' 대통령 부인상에 대부분 지쳐있다. 실제로 대통령 부인들이 인사나 각종 이권에 개입한 사례를 우리는 여러 번 목격해왔기 때문이다.
21세기는 여성의 세기다. 여기에 맞게 대통령 부인 역시 대통령의 동반자로서 또한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제목소리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다. 그런점에서 대통령 후보 부인도 '대통령 부인이 되면 이렇게 하겠다'는 pet project(대통령 부인 수행계획)를 밝혀야한다. 현모양처의 그림자적 내조뿐 아니라 전문성을 갖춘 정치적 동반자를 시대가 원하고 있으므로.
이제는 한번쯤, 우리도 당당한 후보 부인을 만나 보고 싶어진다. 유세기간중 시장이나 불우시설만을 찾아가는 후보 부인보다는, 또 언론에 등장해 집안이야기만 하는 후보 부인보다는 젊은이들과 정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밝힐 수 있는 그런 대통령 후보 부인을 정말 만나고 싶다. 지나친 욕심일까, 한국에서는.
김순재(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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