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6·25' 정전 50주년-어정쩡한 협정체결-포성 멎었으나 평화정착은 가시밭길

오는 27일로 6·25 전쟁 정전협정이 맺어진지 50주년이 된다.

1951년 7월 개성에서 시작된 정전협정 협상은 2년동안 무려 160차례나 계속됐다.

오늘날 정전협정이 갖는 의미와 한계를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전쟁의 상흔 등 당시 상황과 평화체제로 가는 길등을 조명한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 회담장.

윌리엄 해리슨 미군 중장과 남일 인민군 대장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각자의 탁자에 앉아 정전협정문에 서명했다.

찌는 듯한 삼복더위가 무색하게 냉기가 회담장안을 감돌았다.

12분만에 서명을 마친 두 사람은 무표정하게 남과 북으로 각각 발길을 돌렸다.

인사말을 건네기는커녕 목례도 없었다.

정전협정이 조인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어 서명 12시간 만인 이날 오후 10시 드디어 6·25 전쟁은 '동족상잔'의 통한과 상처를 남긴 채 막을 내렸다.

민족 최대의 비극으로 기록된 6·25전쟁은 단비가 내리던 50년 6월25일 미·소 양극 간 냉전의 산물인 38선 이북에서 인민군이 남쪽을 향해 일제히 포문을 열면서 시작됐다.

최초 열흘간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데 급급했던 국군은 7월5일 유엔군이 참전함으로써 힘을 얻었으나 전세를 뒤집지는 못했다.

낙동강까지 후퇴한 국군은 인민군의 8, 9월 총공세를 결사항전으로 물리쳤고 9월15일에는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역전의 기회를 잡았다.

유엔군과 국군은 여세를 몰아 10월9일 38선을 돌파한 데 이어 10월26일 압록강변 초산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뒷걸음질해 51년 1월4일 서울을 내주고 말았다.

그 뒤 평택-충주-삼척을 축으로 전선을 구축한 국군과 유엔군은 대반격을 개시, 3월 중순께 다시 서울을 회복한 뒤 휴전선 부근에서 인민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애초 '3주 내 승전'을 장담했던 북한은 막대한 인력손실과 경제파탄에 직면,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었고 미국 내에서는 또 다른 세계대전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나타났다.

오로지 이승만 정부만 '북진통일'을 외치며 휴전에반대했다.

드디어 51년 7월10일 개성에서 휴전협상이 시작됐으나 내용은 소모적이었다

빠르면 6주 내에 협상이 타결될 것이라는 처음 기대와는 달리 협상의제를 설정하는 데만 2주일이나 걸렸다.

심지어 양측 대표가 말 한마디 없이 2시간11분 동안 '눈싸움'을 벌인 적도 있었다.

처음에는 군사분계선 문제로 실랑이하다 52년 초부터는 포로교환 방식을 놓고 무려 18개월 동안 설전을 벌였다.

정전협상이 계속되는 동안 양쪽은 불모고지, 백석산, 백마고지, 저격능선, 피의능선, 351고지, 수도고지 등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막대한 피해를 봤으나 역설적으로 이들 진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전선은 굳어지고 있었다.

어렵사리 조인된 63개항의 정전협정은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설치,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독위원회 설치 및 임무, 전쟁포로 교환 등 3개 군사부문과 정치회담 소집으로 크게 나뉜다.

'군사적 봉합'에 그친 정전협정을 토대로 '정치적 협상'을 통해 평화체제를 구축하겠다는 취지에서 54년 4월26일 제네바에서 열린 정치회담은 본래의 뜻과는 달리 아무런 성과 없이 87일만에 막을 내렸다.

결국 한반도 평화는 정전협정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쌍방 간에 정전협정을 준수하려는 의지는 미약했다

정전협정을 무력화하려는 기도가 계속되면서 '비무장지대'마저도 군사시설물이 들어서는 '중무장 지대'(?)로 변질됐고 적대행위 금지 의무 역시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8·18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땅굴 발견 등으로 빛이 바랬다.

더구나 중립국감독위원회의 감시 활동이 간첩행위 논란 끝에 56년 기능을 상실했고 군사정전위원회마저도 91년 3월 한국군 장성이 유엔사측 수석대표로 임명된 이후 한 번도 열리지 않은 데다 94년 4월 북한이 아예 철수하는 바람에 정전협정은 사실상 유명무실한 존재가 됐다.

정전체제를 감시, 조정하는 중립국감독위원회와 군사정전위원회가 제 역할을 잃은 것은 양측의 갈등을 방치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정전협정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한반도를 전쟁도 평화도 아닌 어정쩡한 지역으로 규정하면서 무력충돌의 위험을 해소시키지 못한 채 그빛을 잃어가고 있다.

제성호 중앙대 교수는 "협정 위반에 대한 객관적인 판정과 시정장치가 미흡했기때문에 실제로 효력을 발휘한 조항은 단지 몇 개 뿐"이라면서 "평화협정도 중요하지만 우선 남과 북이 정전협정과 남북기본합의서 등 기존의 합의에 대한 이행을 실천함으로써 신뢰를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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