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영화 '아카시아', '아이들이 더 무섭다'

공포란 무엇인가? 최근 피가 튀기는 화면으로 '시각적 공포'만을 노린 슬러시 영화가 많이 나오긴 하지만, 실상 공포영화의 매력은 마음속에 잠재된 치부를 들키는 두려움에 있다.

드라큐라가 무서운 이유가 그의 뾰족한 이빨 때문일까? 솔직히 우습게 보자면 들쥐 이빨마냥 유치할 수도 있다

컴퓨터 그래픽이 발달하면서 공포영화도 화려해지고 발달을 거듭했지만, 실감나는 살해장면의 묘사가 가능해지면서 인간의 잠재된 공포를 두드리는 영화는 되레 줄어들었다고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17일 개봉할 박기형 감독의 '아카시아'는 그런 사람들에게 반가운 영화다.

피 튀기는 잔혹함보다 영화속 인물의 모습에서 '나 속의 나'를 발견하며 흠칫 놀라는 그런 공포물이다.

▷새엄마는 엄마가 아니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불임과 재혼이 '소수의 일'이 아니다.

재혼이나 입양을 하게 되면 아이들에게는 새엄마와 새아빠가 생기게 되지만, 아직도 우리에겐 '바람직한 새엄마像'이 없다.

재혼녀들은 "결혼 후 자식을 낳지 않겠다"는 약속이 남편의 자녀들을 위한 결단인 듯 생각한다.

이유는 핏줄을 소중히 여기는 우리 사회분위기 때문인데, 과연 '입양한 자식'과 '배아파 낳은 자식' 사이에서 절대 우위가 있는가.

여기 한 불임부부가 있다.

의사인 남편과 직물공예를 하는 부인은 10년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자 입양을 결심한다.

고민 끝에 보육원에서 한 남자아이를 데리고 와 친자식처럼 사랑하려 했다.

그런데 부인이 임신을 하게 된다.

주변에서는 입양아를 돌려보내라 하기도 하고, 부부도 친자식처럼 입양아를 사랑할 수 없을 것만 같아 고민스럽다.

입양된 아이는 부모가 다시 자신을 버릴지도 모를까봐 두렵다.

단란했던 가족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핏줄로 이어지지 않은 새엄마에 대한 두려움은 이미 '장화홍련'에서도 나타났다.

새엄마는 자신과 피로서 이어지지 않은 딸들에게 냉담했고, 딸도 새엄마를 경계했다.

'아카시아'에서도 입양아는 친자식과 같을 수 없고, 덜 사랑받게 될 것이라 말한다.

이야말로 '핏줄'에 대한 우리 사회의 강박관념이 부른 공포가 아닐까. '기른 정'은 절대 '낳은 정'을 이길 수 없다는 편견, 교양 있는 중산층 부부도 '내 핏줄' 앞에서만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압박, 이것이야말로 진짜 두려움이다.

▷요즘은 아이가 더 무섭다

허먼 멜빌의 '백경'이란 책을 읽으면 흰색에 대한 공포를 묘사한 부분이 있다.

사람들은 흔히 캄캄한 암흑을 무서워하지만 실제 더 무서운 건 흰빛이다.

보이지 않는 두려움보다 보이지만 어쩔 수 없는 두려움이 진짜 공포다.

게다가 방심하던 중 공격당했을 때 충격은 더하다.

어릴 때는 흉칙한 괴물과 귀신이 무서웠지만, 나이가 들면 '사람'이 무섭다는 걸 알게 된다.

'아카시아'는 한발 더 나아가 순수와 천진난만의 상징인 어린아이가 더 무섭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건 방어하지 않고 있다 당하는 공포이며,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공포이기 때문이다.

최근 등장하는 공포영화들은 대부분 이 새로운 공식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동안 영화에서 금기시됐던 유아살해나 존속살해를 전면에 내세운 '4인용 식탁'의 아이들은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줬다.

여기에 '장화홍련'과 '주온'의 아이들은 왜 아이들이 어른보다 더 무서운지를 실감케 하는데 충분하다.

아카시아 나무와 대화를 나누는 아이, 나무를 엄마라고 부르는 아이. "우리 엄만 벌써 죽었어. 죽어서 나무 됐어. 어제도 엄마가 날 불렀어" 이쯤 되면 칼 들고 서 있는 어른보다 더 소름 돋지 않는가.

정욱진기자 pencho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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