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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개혁-(7)강홍립의 그 후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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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에 투항한 강홍립은 다른 조선인 포로들이 석방된 후에도 부원수 김경서(金景瑞) 등과 함께 계속 억류되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우는 나쁘지 않아서 "연려실기술"은 누루하치의 둘째 아들 다이샨의 양녀와 결혼을 하고 명나라 포로 500명을 하인으로 받았다고 적고 있다.

그는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 후금군과 함께 조선에 들어왔다.

후금과 싸우러 갔던 도원수가 후금군의 선도가 되었으니 그의 인생유전 또한 평범하지 않다 할 것인데, 이미 조선은 후금의 상대가 아니어서 인조는 서울을 버리고 강화도로 도망갔다.

문제는 어떤 조건으로 강화를 맺어 후금군을 철수시키느냐 하는 것인데, 강홍립이 중재 역할을 맡았다.

강홍립은 가능하면 조선이 좋은 조건에서 강화조약을 맺을 수 있도록 노력했는데, 인조와 대신들에게 후금군의 장단점을 자세히 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과 후금이 형제의 맹약을 다짐하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 짓도록 유도했다.

강홍립이 없었다면 후금군은 도성 일대에 머물지 않고 충청.경상.전라도 지역까지 남하했을 수도 있었다

조선으로부터 형의 나라로 섬김을 받는 형제맹약을 체결한 후금군은 조선을 떠났으나 강홍립은 조선에 남아 있었다.

오랑캐에게 항복했다는 숱한 비난에 시달리던 그는 그 때문인지 후금군이 철수한 직후인 그해 7월 27일 병사했는데, 인조는 그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장례비를 지급하려고 했으나 많은 신하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했다.

역사평론가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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