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특별기고-'질레트'의 교훈

세계적 다국적 기업으로 지구촌 곳곳에서 명성이 드높은 미국 질레트(Gillette)사의 성공도 사실은 한 평범한 셀러리맨의 아이디어와 그 실용화에서 출발했다.

19일 다시 맞는 '발명의 날'에 질레트는 우리에게 그 점을 다시 환기하는 경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100여년 동안 생활 필수품으로 사랑 받아 온 안전면도기의 대명사인 '질레트'의 탄생은 18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여름, 미국 보스턴으로 출장 갔던 K 질레트는 과중한 업무로 지쳐 늦잠을 자고 말았다.

약속 시간을 지키려니 서둘러야 하는 것. 황급히 면도하던 질레트는 그만 얼굴을 몇 군데나 베이고 말았다.

이 일만으로도 화가 났으나 거래처와의 협의도 잘 풀리지 않았다.

풀이 죽은 질레트가 거울을 보면서 한 생각은 "살갗을 베지 않는 면도기를 만들면 어떨까?"하는 것이었다.

그 뒤 질레트는 일년이 넘도록 날카로운 면도날과 씨름하며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점차 지쳐가던 즈음, 이발소에 들렀다가 어느 순간 해법을 깨달았다.

"그래! 빗에 얇은 칼날을 붙이면 되겠구나". 이발사가 가위를 빗에 눌러대고 모발을 자르고 있었던 것이다.

빗살 사이로 삐져나온 수염만 잘라내게 한다면 면도를 해도 얼굴 피부를 전혀 다치게 할 염려가 없을 터였다.

어쩌면 당연하고 평범하기만 한 원리였지만 응용의 깨달음은 그의 운명을 바꿨다.

질레트는 그 즉시 특허를 출원하고 친구의 도움을 받아 생산에 들어갔다.

공장을 가동한 지 한달도 채 못돼 일년 내내 공장을 돌려도 공급량을 다 못댈 엄청난 주문이 쇄도했다.

공장 설립 첫해 순익이 자그마치 500만 달러를 넘어섰고, 2년 후 세계 20개국으로 수출했으며, 10년 후에는 무려 50여개 국에 현지 공장이 세워졌다.

자세히 살펴 보면 우리 일상에도 불편한 게 비일비재하다.

대부분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치거나 조금 불편해도 감수해 버리곤 할 뿐이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면 인류는 지금의 문명화된 사회로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은 뻔한 일이다.

문제의식과 개선 노력들이 인류의 역사를 바꿔 온 것이다.

필자가 일하고 있는 RIST(포항산업과학연구원)도 이런 면에서 산업 아이디어의 현장화.생산화에 작잖은 기여를 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1987년 설립된 RIST는 현장 조사, 실험, 개발 기술의 생산현장 적용 등 3단계 연구시스템을 구축해 지난 17년 동안 7천여 건의 연구 과제를 수행함으로써 6천여 건의 산업재산권을 출원한 것이다.

300여명의 RIST 연구진이 정말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그 같은 외형적 규모뿐 아니라 자체 개발 기술의 83%(2003년 기준)가 생산 현장에서 실용화되도록 했다는 점이다.

기술 개발을 의뢰한 고객들에게 연구보고서나 제출하고 마치는 메아리 없는 생색내기용 연구를 한 것이 아니라 고객들이 새 기술을 바로 산업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고객의 입장에서 임무를 다했다는 것이다.

순수 민간 연구기관인 RIST가 확고하게 자리잡고 독자적인 발자취를 남겨온 것은 바로 그 같은 '생활화' '현장화' '산업화'를 지향해온 시스템과 노력의 산물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질레트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개인의 조그마한 관심과 아이디어가 세상을 바꾼 예를 드물잖게 알고 있다.

RIST가 아니더라도 곧바로 실용화할 수 있는 기술 개발을 지향해 문명 발달에 기여해 온 전문 기관들을 세계 속에서 드물잖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더 많은 발명과 기술 개발은, 그것이 특정한 사람들의 경험과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일반인 누구나 항상 생활 속에서 해 낼 수 있는 일이라는 인식이 사회 저변에 자리잡을 때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지속적이고도 체계적인 교육과 의식개혁이 선행돼야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요즘 같이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각하고 과학기술 개발 활동이 위험 수준으로 정체돼 있어서는 기대할 수 없을 터이다.

늦게나마 국가에서 차세대 성장동력 산업을 모색하고 과학 기술 발전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강구하며 이공계 인력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희망적이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과학기술자들도 연예인들처럼 청소년들에게 스타로 대접받는 분위기까지 형성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슬며시 기대가 생길 정도이다.

매스컴을 통해 만들어진 스타가 아니라 땀과 노력으로 일궈진 진정한 스타로서 과학기술인들이 대접받을 때 과학기술의 저변은 확대되고 그 앞날은 한층 밝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제의 첨단(尖端)이 오늘의 진부(陳腐)'가 되고 마는 급속한 변화의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기술 경쟁력만이 국가의 우열을 가름하는 게 현실이다.

우리 국가는 물론이고 개개인의 미래를 담보해 줄 첫 걸음은 무엇일까? 발명과 과학기술의 저변을 확대하자. 100만명 아니 1천만명의 과학기술 예비군을 육성하자. 발명의 날을 맞아 호소라도 하고 싶다.

홍상복 포항산업과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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