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로에서 사람 구경을 하고 있다가 걸음을 옮겨 공원으로 간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피곤한 다리를 쉬게 해 주기 위해서기도 하고, 많은 인파가 뿜어내는 열기를 피하기 위해서기도 하고, 비싼 돈을 들이지 않고라도 목을 축일 장소를 찾기 위해서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이런 것들은 당신이 공원을 찾는 이유와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정도의 이유라면 굳이 국채보상운동공원일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그래요, 제가 시내 한 복판을 가로질러 찾았던 공원은 바로 삼덕 '순찰지구대'-요즘 파출소라는 명칭은 쓰지 않더군요-가 있는, 조금만 더 걸어가면 중앙시립도서관이 있는 그 공원이었죠. 그 공원을 꼭 가야만 했던 이유는 한 달에 겨우 한 번 열리는 '깨비예술시장' 때문이었습니다. 원래는 매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열리지만 그 전 주에 비가 와서 한 주 연기되어 버렸던 거리의 시장. 이 행사를 이번만은 놓치지 않으리라는 결심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여 갔던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해 냈을 때 제 자신을 기특해 하기까지 하면서 말이지요. 여유 있게 걷다보면, 평소에는 잊고 지나쳐 버렸을 소소한 정보가, 행사장 근방을 지나칠 때쯤 불현 듯 떠오르기도 하는가봅니다.
서울에서 홍대 앞 프리마켓이 활성화되면서 각 지역에서도 이름은 다르지만 방향성은 비슷비슷한 마켓을 형성하고 있지요. 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 바로 "깨비예술시장" 이랍니다. 매주가 아니고 매달이라는 점이 조금 다르지만, 드문드문이긴 해도 작은 힘들이 모이고 있다는 소식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지요.
부푼 기대를 가지고 그렇게 국채보상운동공원엘 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공원 입구는 텅 빈 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럴 수가!! 분명히 6월 6일이라고 했는데. 약간의 배신감마저 이는 순간이었습니다. 홀로 망연히 서 있던 한참을 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 10여 초간?? 제게 꽤나 긴 시간 같았죠.
마음을 고쳐먹고 공원 안으로 잠입을 시도하기로 했어요. '아마도 취소되었을거야!' 라는 마음의 방어막을 치고, 그래도 혹시나 하면서 말이에요. 다행히도 저의 우려는 기우였습니다. 공원 안쪽 그늘진 길을 따라 '깨비예술시장'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입구에서 그냥 실망하고 돌아서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던지요. 분명 예전의 경험치에 따르면 공원 입구에서 열리고 있었어야만 했거든요. 여하튼 가슴을 쓸어내리며 본격적인 구경에 나섰습니다.
오랜만에 방문한 깨비예술시장은 행사하는 위치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조금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각 참여작가들이 자리를 깔고 간격을 두고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이번에는 무지무지 커다란 깔개 위로 거리를 오가는 손님들을 위한 길을 그려놓고, 양쪽으로 옹기종기, 나란히, 다닥다닥 좌판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커다란 깔개는 공원의 보도블럭과 경계지어져, 새로운 세계로의 입문을 저에게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커다랗게 '일방통행'이라 씌어진 그 깔개 위로 발을 한 발짝 들여놓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다가가기를 주저하는 '나 홀로 섬', '수수 방관자' 같은 저에게는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지요. 그래서였을 겁니다. 한동안 안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주변 보도블록 위에서 그 위를 지나는 사람들과 작가들을 한참 바라보기만 했던 이유도.
엄마와 아기가 물건을 구경하며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구경꾼들이 좀 더 생겨 주위가 조금 산만하다 싶을 때야 저도 각 좌판을 기웃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소심하죠? 자세히 보기도 민망해서 술렁술렁 지나갑니다. 그러다 맘에 드는 캐릭터 하나 발견! 그 좌판에 용기 내어 쭈그리고 앉아 이것저것 자세히 구경하며 가격까지 물어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하니 설핏 지나친 옆집 물건도 아기자기 예쁘게 보입니다. 그렇게 용기를 얻게 되자 처음에 휘리릭 지나쳐 버린 좌판에 돌아가서 좀 더 자세히 물건을 관찰합니다.
생활용품에 자신만의 캐릭터를 덧그려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나온 이, 조물닥조물닥 손수 만들어 가져온 지우개를 만들어 팔던 어린 친구, 아~! 타로 카드를 가져 나온 분도 보이네요. 비즈로 만든 악세서리, 흔한 병뚜껑에 색을 입히고, 그림을 넣고, 글을 넣은 작품도 있습니다. 그림으로 심리테스트를 하는 좌판도 있습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처음에는 낯설게만 느껴지던 시공간에 익숙해지자 사람들의 행동을 바라볼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보이고, 카메라를 눌러대며 추억을 남기는 이들도 보이고, 서로서로의 친목을 다져가는 작가들 간의 교류도 눈에 들어옵니다. 사물이 들어온 다음에야 그 너머에 존재하던 사람이 눈에 들어오더이다. 그렇게 낯선 세상이 제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답니다.
그다지 거창한 행사이진 않았더라도, 햇살 아래 장기자랑 하던 그 고등학생들 같이, 땡볕에도 땀 흘리고 뛰며 농구하던 친구들 같이, 아이들과 여유로운 한 때를 지내던 공원벤치에 앉은 젊은 엄마아빠들 같이, 햇살 가득 담은 공원 한 부분을 아름답게 장식해 주었던 깨비예술시장이었습니다.
마음을 열고나니 아무리 하찮은 것이어도 소중해 지고, 그 너머에 있는 '존재'를 만나게 되고, 그들과의 차이를 느끼고, 그렇게 내 안을 넓혀놓고 나니 내가 사는 이 세계가 아름다워지더군요. 여태껏 조금은 불만스러웠던 대구가 이 날만큼 마냥 좋기만 하던 것은 뜨거운 햇살 때문이기도 하고, 풀어헤친 마음 때문이기도 하며, 내 옆을 지나치던 또 다른 우주, 바로 당신 때문이기도 합니다.
햇빛에 취해 보낸 날들에 대한 보고서는 여기서 막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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