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그리고 11월. 한가롭게 농촌 들녘을 휘젓고 노니는 고추 잠자리 날갯짓이 가벼울수록 농민들의 속이 더욱 타들어 가는 계절. 늘 설레는 마음으로 맞았던 가을. 그러나 올핸 그렇지 않다.
지금 전국 400만 농민들은 곳곳에서 자식처럼 애지중지 키워 온 황금 벼를 태우거나 한데(밖) 쌓아 놓고 길거리로 나서고 있다.
이들의 신음소리로 가을의 전령사 고추잠자리가 되레 애처로울 따름이다.
마침 어제(11일)는 흙을 생명으로 여기는 '농업인의 날'이었다.
정부가 11월 11일을 농업인의 날로 정한 것은 '흙 토(土)'가 겹쳐져 길일(吉日)로 여긴 데다 농사일이 마무리되는 시점이기 때문.
올해 아홉 번째로 맞은 농업인의 날이었건만 기쁨보다는 시름이 더 깊어갈 뿐이다
당장 13일 전국 농민들이 서울에 모여 쌀협상과 정부의 농정에 대한 규탄대회를 벌일 참이다.
과연 우리 농업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지난 1980년대 중반부터 계속된 농업분야 개방 압력은 20년 가까이 우리 농민들의 목줄을 죄더니 이제 마지막 남은 민족산업 '쌀'마저 위협하고 있다.
세찬 폭풍 앞에 매달린 '마지막 잎새'처럼 풍전등화의 기로에 섰기에 올해 농심(農心)은 더욱 착잡할 따름이다.
우루과이 협상 결과, 지난 95년부터 10년 간 쌀시장을 전면 개방하지 않는 대신 해마다 일정량의 외국쌀을 수입하는 것으로 유예됐던 시한이 올해로 끝난다.
그러기에 정부는 연말까지 쌀시장 개방여부를 결정해야 할 입장이다.
갈수록 세대의 흐름과 세태의 변화로 입맛이 달라지면서 쌀보다는 패스트푸드를 선호하고 우리 것보다는 수입농산물에 더욱 익숙해진 탓에 그나마 우리 농업의 마지막 보루인 쌀마저 소비가 급감, 농민들이 더 이상 생산의욕을 느끼지 못할 형편에 다다르고 있다.
한때 연간 1인당 130kg 넘게 소비하던 쌀이 이제는 80kg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줄었고 수입 쌀은 넘쳐나고 있다.
우리 쌀이 남아도 떡볶이나 막걸리에는 이익이 많이 남는 수입쌀을 쓴다.
각종 가공용으로 수입쌀만 써도 남을 정도이니 우리 쌀이 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정부가 쌀값을 예전과 달리 제대로 보장하지 않고 쌀시장마저 경쟁력 없는 것으로 판단해 개방할 경우 5천년 지켜온 민족산업인 쌀 산업은 더 이상 버틸 힘을 잃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누가 계속 농사를 짓고 싶겠는가. 땅을 버려야 할 입장이다.
이는 한국 쌀시장을 노리는 미국과 중국 등 수출국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기회가 되는 셈이다.
국민들에게 우리나라 1년 간 쌀 생산량이 국내 술시장과 맞먹는 10조원대에 이르고 우리나라 전체 논 농사를 유지할 경우 8조~13조원의 효과를 본다는 이점을 아무리 이야기한들 무엇하랴. 논을 버리지 않는 것이 홍수를 조절하고 탄산가스 흡수와 산소방출 및 유해물질을 순화시키는 환경정화 등 공익적 기능을 하는 것이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누가 새겨들을 것인가.
과거 미국 아이오와 대학 프랭클린 킹 농업경제학과 교수가 한국, 일본, 중국을 방문해 쌀 농사 방식을 본 후 훗날 남긴 글(사천년을 이어 온 농민들:영속하는 중국·한국·일본의 농업)이 생각난다 . "주곡으로 벼를 선택한 것, 여름철 집중강우의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물을 대고 빼는 시스템을 개발하고 유지한 것…. 거의 종교와도 같은 신심의 여러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원리가 '영속하는 농업'의 핵심을 담고 있다.
만약 미국이 이들 몽고족 나라들처럼 3천년 내지 4천년에 걸쳐 역사를 잇고자 한다면, 그리고 그 역사를 평화가 지속되고 기근과 전염병이 없도록 하려면 이런 농업을 본 받아야 할 것이다.
"
가을, 그리고 지구에서 가장 먼저 태어난 곤충으로 가을을 알리는 잠자리. 3억6천만년 전에 나타났다 중생대에 멸종하고도 2억5천만년 전에 다시 출현해 아직도 건재한 잠자리. 5천년 이어 온 우리 농촌, 잠자리보다 더 오래오래 살아 남도록 하소서. 내년 농업인의 날은 희망이 넘치도록 해 주소서.정인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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