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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에서-인간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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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은 읽어도 읽어도 곱씹어 볼 대목이 많은 명작이다.

유대인으로서 아이히만 재판사건에서 열렬하게 인권을 옹호했던 아렌트는 자기 저작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조건을 설득력 있게 살핀다.

우리가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에서 눈여겨볼 것은 북한 핵 문제처럼 핵병기시대에 대한 것도 전체주의에 대한 것도 아니다.

필자가 이 책을 읽으면서 받았던 감동은 무엇보다도 '나타남'과 '유일성'의 문제였다.

아렌트에 따르면 우리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렌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 영향을 받아 그 나타남의 문제를 유일성의 문제와 연결시켜 말한다.

우리 또한 흔히 이 많은 인간들이 어쩌면 저리도 서로 얼굴들이 하나같이 다른지 감탄할 때가 있다.

그 '다름'의 의미를 아렌트는 유일성의 문제와 결부시켜 말한다.

아렌트가 인용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에 따르면, '나'라고 하는 인간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어디에도 없었고 '내'가 죽은 후에도 나 같은 인간은 없을 것이라고 한다.

평범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유일무이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긍정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나 이 세상에 나타나는 순간 유일성의 존재가 된다.

나 같은 사고, 나만의 감수성, 나만의 유전체질, 나만의 성격은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나만의 유일한 지표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나타난 우리들 각자의 차이를 용납하지 않은 채 한 방향으로 몰아간다.

인간의 유일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인간을 상품으로 취급한 채 각 개인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몸값을 올리는 데에만 열중한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는 대세다', 이 한마디로 유일무이한 인간의 조건, 각 개인이 이 세상에 나타난 조건들을 모조리 무시한다.

비정규직 문제든 대학의 구조조정 문제든 오륙도든 사오정이든 현대의 인간들은 모두 좌불안석의 상황에 처해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내가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로 나타난 이유는 무엇인가?

이득재·대구가톨릭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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