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속의 한자-五十步百步(오십보백보)

孟子對曰, "王好戰하시니 請以戰喩하리이다. 塡然鼓之하여 兵刃旣接이어든 棄甲曳兵而走

맹자대왈 왕호전 청이전유 전연고지 병인기접 기갑예병이주

하되 或百步而後止하며 或五十步而後止하여 以五十步로 笑百步하면 則何如하니잇고." 曰,

혹백보이후지 혹오십보이후지 이오십보 소백보 즉하여 왈

"不可하니 直不百步耳언정 是亦走也니이다."

불가 직불백보이 시역주야 양혜왕 상

* 喩(유) 비유하다 * 塡(전) 북소리 * 曳(예) 끌다

전국시대(戰國時代)인 4세기 중엽, 위(魏)나라 혜왕(惠王)은 진(秦)나라의 압박에 견디다 못해 도읍을 대량(大梁)으로 옮겼다.(이후 양나라라고도 불렸음) 그러나 제(齊)나라와의 싸움에서도 늘 패하는 바람에 국력은 더욱 떨어졌다. 그래서 혜왕은 국력 회복을 자문하기 위해 당시 제후들에게 왕도 정치론을 *遊說중인 맹자를 초청했다. 혜왕은 전쟁을 좋아하던 군왕이었으므로 전쟁에 비유하여 말을 한 것이다. 맹자 양혜왕 편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양혜왕이 맹자를 보고 물었다. "내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 최선을 다하고 있다. 하내(河內)에 흉년이 들면 그 백성을 하동(河東)으로 옮기고 하동의 양식은 하내로 옮겨오며, 하동이 흉년이 들면 또한 그와 같이 하였다. 그러나 이웃 나라의 정사를 살펴보면 과인과 같이 마음을 쓰지 않아도 그 백성이 줄지 아니하고 또한 과인의 백성들이 늘지 않으니 그 까닭이 무엇이오."

맹자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왕이 전쟁을 좋아하시니 청컨대 전쟁으로써 비유[喩]하겠나이다. 둥둥[塡然] 북[鼓]을 쳐서 병기[兵]와 칼날[刃]이 이미[旣] 접하였거든[接], 갑옷[甲]을 버리고[棄] 병기를 끌면서[曳] 달아나되[走], 어떤 이는 백 보를 달아난 뒤 멈추었고, 어떤 이는 오십 보를 달아난 뒤 멈추어서, 오십 보를 달아난 것으로서 백 보를 달아난 것을 비웃는다면 어떠합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대답하여 말하길 "안 됩니다. 단지[直] 백 보가 아닐 뿐 이 또한[亦] 달아난 것이요." 그러자 맹자가 "왕께서는 이런 것을 아신다면 내 나라의 백성이 이웃 나라보다 많기를 바라지 마십시오."라고 한 데서 五十步百步가 연유되었다. 곧 五十步百步는 조금 낫고 못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맹자의 생사 연대는 정확히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없으며, '史記(사기)'에 맹자의 이름은 가(軻), 자(字)는 자여(子輿)이며 추(鄒)나라 사람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에는 유력한 제후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귀속시켜 천하의 *覇權을 장악하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맹자는 임금은 어진 덕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하며, 또 경제가 넉넉해지고 난 다음에 도덕 교육을 해야 한다는 왕도정치론(王道政治論)을 주장했다. 힘으로는 인심을 장악할 수 없으며, 인애(仁愛)에 의한 왕도로써만 민심을 얻고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고 하였다. 군대나 영토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민심의 장악이야말로 통치의 *要諦라는 것이 맹자의 주장이었다. 이 왕도론은 이상주의적인 사상이어서 결국 사용되지 못하였다. 五十步百步 또한 맹자의 이런 사상이 잘 담긴 말이다. 五十步百步와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말로는 大同小異(대동소이), 彼此一般(피차일반), 그 밥에 그 나물 등과 같은 것이 있다.

*遊說(놀 유, 달랠 세) : 각처로 돌아다니며 자기의 의견이나 소속 정당의 주장 따위를 설명하고 선점함, 또는 그 일

*覇權(으뜸 패, 권세 권) : 우두머리나 승자의 권력

*要諦(요할 요, 살필 체) : 사물의 가장 중요한 점

자료제공 : 장원교육 한자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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