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느린 삶

러시아에서 도시와 도시 사이를 움직일 땐 늘 비행기를 이용했다.

그러나 봄·가을엔 안개, 겨울엔 눈 때문에 비행기가 지연되는 일이 잦다보니 딴 방도를 찾아야 했다.

그러던 중 한 독일인 교수가 기차여행을 권했다.

한 번은 급히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로 가야 하는데 비행기 1등석마저 동이 났다.

할 수 없이 22시간을 기차로 움직였다.

니즈니 노고보로드에선 겨우 새순이 돋았는데 남쪽으로 가면서 점점 녹색이 짙어져 키예프에 도착했을 땐 꽃들이 활짝 피어나고 있었다.

얼마전 카잔에서 핀란드 헬싱키까지 기차와 버스로 4박5일 걸려 다녀온 후론 10여 시간 기차여행 정도는 가뿐하게 여겨진다.

러시아 오케스트라가 유럽순회연주를 할 땐 대개 3박4일간 버스로 왕래한다.

중국유학생들도 러시아로 유학올 때는 1주일이나 걸려 세탁기까지 버스에 싣고 온다고 한다.

러시아에서 20시간 기차여행은 자고나면 도착하는 가까운 거리다.

아직도 기차표를 살 때 여권이 필요하고, 자리도 여러 종류라 표 한 번 사는데 10분에서 1시간까지 걸리지만 비행기보다 기차가 편하고, 탈 때마다 가격 흥정하는 게 귀찮아 택시보다는 전철이나 지하철을 타게 된다.

지난해 11월은 한국, 12월은 미국, 올 1·2월은 러시아에서 보냈다.

풍요로운 나라 미국이지만 사람들은 각종 청구서에 스트레스 받고, 몇 달 밀리면 당장 차와 집을 빼앗겨 거리로 나앉아야 한다.

먹을 것 걱정하고, 사는 게 좀 불편해도 식후엔 볼가강변을 산책하고 저녁엔 오페라나 발레를 즐기며 느긋하게 사는 러시아인들이 더 여유로워 보인다.

평생 동안 더 많이 가지려, 더 많은 걸 이루려 아등바등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마음의 여유가 필요한 것 같다.

지휘자 노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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