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속의 한자-咸興差使(함흥차사)

[원문]

芳碩變後(방석변후)에 太祖(태조)가 棄位(기위)하고 奔于咸興(분우함흥)하니 太宗(태종)이 屢遣中使(누견중사)하여 問安(문안)이나 太祖(태조)가 輒彎弓而徒之(첩만궁이도지)하니 前後相望之使(전후상망지사)가 未敢道達其情(미감도달기정)이러라.

時(시)에 問安使(문안사)가 無一得還者(무일득환자)러니 太宗(태종)이 問群臣(문군신)하되 "誰可遣(수가견)고?"하니 莫有應之者(막유응지자)러니 判承樞府事朴淳(판승추부사박순)이 挺身請行(정신청행)하더라.

[해석]

방석(芳碩: 조선 태조의 여덟째 아들.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제1차 왕자의 난 때 살해됨)이 변을 당한 후에 태조가 왕위를 버리고 함흥으로 가니, 태종이 여러 차례 중사를 보내 안부를 묻게 하였으나, 태조가 번번이 활을 당기고서 그들을 기다렸으니 앞뒤로 잇달아 파견된 사신이 감히 그 뜻을 말하여 전달하지 못하였다. 이때 안부를 물으러 간 사신 중 돌아올 수 있었던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태종이 여러 신하들에게 묻기를 "누구를 파견할 만한고"하니, 그 말에 응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니, 판승추 부사 박순이 솔선하여 가기를 청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아들들이 왕위를 놓고 두 번씩이나 싸우자, 왕위를 정종(定宗)에게 물려주고 고향인 함흥으로 내려갔다. 정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태종(太宗)은 여러 번 함흥으로 차사(差使: 임시 벼슬 이름)를 보내어 아버지를 모셔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극도로 노한 이성계는 사신이 오기만 하면 활로 쏘아서 즉시 죽여 버렸기 때문에 함흥으로 간 사신치고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하여 심부름을 가서 소식이 없거나 더딘 것을 '함흥차사(咸興差使)'라고 한다.

태조와 같이 고생하여 교분이 두터웠던 성석린(成石璘)과 박순(朴淳) 역시 모두 성공하지 못하였다. 나중에는 무학대사(無學大使)가 내려가 *起居(기거)하면서 "그동안 고생하여 만든 국가를 남에게 주는 것보다는 고생을 함께 한 태종에게 주는 것이 그래도 낫지 않겠습니까?"라고 설득하여 마침내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고사 성어라고 하면 주로 중국의 고사 성어를 떠올리기 쉬우나,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고사 성어도 적지 않다. 계란유골(鷄卵有骨)은 늘 일이 잘 안 되는 사람이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났으나 역시 잘 안 되는 경우를 이르는 말로 조선 세종 때 황희 정승의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삼일천하(三日天下)는 사흘 동안 천하를 차지함, 즉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정권을 잡았다가 무너짐을 이르는 말로 조선 인조 때 이괄의 난에서 유래하였다. 삼마태수(三馬太守)는 세 마리 말만 가지고 간 태수라는 뜻으로 *淸白吏(청백리)를 지칭하는 말이며, 조선 중종 때 송흠의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자료제공: 장원교육 한자연구팀

◇ 한자풀이

*奔(분)달아나다, 屢(루)자주, 遣(견)보내다, 輒(첩)문득, 彎(만)당기다, 挺(정)빼다

*起居(일어날 기, 살 거) : 일정한 곳에서, 일상 생활을 함. 또는 그 생활

*淸白吏(맑을 청, 흰 백, 벼슬아치 리) : 청백한 관리. 조선시대에 각 관에서 천거하여 뽑힌 결백한 관리를 이르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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