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이의 엄마, 한 남자의 아내로 20년을 살았다. 하루가 멀다고 찾아왔던 그 지옥 같은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핏덩이 아이들을 둘러업고 두류공원에서 지샜던 뼛속까지 시린 어느 겨울밤. 모기에 물려 우는 아이들을 데리고 이 거리 저 거리 헤맸던 그 여름의 무더운 밤. 고개를 아무리 저어도 헤어나올 수 없었다. 머릿속 문신처럼 내 기억에 자리 잡았다. 남편 곁을 떠나고 싶었다.
술만 마시면 욕설에 주먹을 휘둘러댔던 남편은 지금 병실에 누워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늘어져 허공을 응시한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참회의 시간일까. 그 넘쳐나던 힘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남편이 안쓰러워지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는 간암 말기다. 암세포가 허리를 통과해서 다리뼈에 자리 잡았다. 내가 만질 수 있는 그의 몸 구석구석은 모두 암세포다. 복수(腹水)가 흘러 발끝까지 퉁퉁 부었다. 한 달 정도. 의사선생님이 마음의 준비를 하란다. 한 달 후.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자동차정비공장에 다니던 남편이 8년 전 어느 날 며칠째 일을 쉬었을 때 혹시나 싶었다. 아이들은 아픈 아빠가 오히려 좋다는 철없는 소리까지 했다. 간경화였다. 가난이 곧 죄가 되는 세상에서 남편은 술로 자신을 위로한 것 같다. 벌어도 끝없이 손을 벌리던 세상. 조금씩 커가는 아이들. 무능력한 아비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가족에게 퍼붓는 몹쓸 호통뿐이었겠지. 술 취한 아빠를 피해 방 안에 갇혔을 때마다 아이들과 작전을 짰다. "아빠를 붙들고 있을 때 현관문으로 냅다 뛰어. 공원 벤치에 가 있어. 엄마도 곧 따라갈게."
이제 내가 그의 곁에서 뭔가를 해줘야 한다. 하지만, 남편 곁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병원 청소뿐이다. 간병사로 시간제 일도 하고 있다. 남편을 돌봐야 할 시간에 다른 환자 곁에서 뭐하고 있는 거지? 그이 곁에는 아무도 없는데. 자주 헷갈린다. 하지만, 손에 쥘 수 있는 돈 40여만 원이 남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최선이다.
마음의 준비는 부여잡을 지푸라기라도 있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된다. 벌써 남편의 장례비 걱정에 잠을 이룰 수 없다. 2년 전 들어간 영세민 아파트의 관리비, 친구들에게 빌렸던 남편의 병원비만 벌써 3억 원. 애들 교육은 어떡하지? 왜 떠나지 못했을까. 속이라도 후련할 텐데. 그동안 우리 애들과 내가 당했던 지난 20년을 생각하면 가차 없어야 하는데 난 참말로 못났다.
이제 아이들은 고2, 고3이 됐다. 아빠라는 덩치 큰 울타리를 벗어났을 때 아이들은 마음부터 떠난 것 같다. 애원하듯 얘기해야만 한 번씩 병원에 들른다. 이제 한 달. 밤낮 가리지 않는 통증 속에서 잠시 잠이 들었을 때 남편은 애들을 부른다. 그렇게 보고 싶으면 진작에 잘하지. 당신은 애들에게 참 몹쓸 사람이었어. 하지만, 곧 알게 될 거야. 당신도 한 땐 아이들을 정말로 아끼던 믿음직한 아버지였잖아. 그래도 난 아직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해 여보.
간암 말기로 투병생활 중인 남편 조영재(45·달서구 본동)씨 곁에서 권점순(48·여)씨는 연방 남편의 다리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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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현기자 ssang@imaeil.com
사진: 권점순씨는 간암 말기로 투병 중인 남편을 돌보고 있지만 불안한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상철기자 finder@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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