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

빈 컵의 하오는

아름답다.

죽은 새 몇 마리의

살점같이

채송화가 피었다.

김용범(1954∼), '채송화'

"빈 컵의 하오는/ 아름답다"라니…대담한 표현이지요? 컵은 물이나 술 같은 액체를 담는 도구(그릇)인데, 비어있기 때문에 도구성을 벗어나 그 자체로 빛납니다. 그런데 이 정황을 시인은 '하오의 빈 컵'이라고 하지 않고 '빈 컵의 하오'라고 씀으로써 시간과 공간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새로 구축된 시공(時空)에 느닷없이 채송화가 등장합니다. 핏빛의 연약한 줄기에 핀 작은 꽃들….

시인은 그 꽃들을 하필 죽은 새 몇 마리의 살점에 비유함으로써 '빈 컵의 하오'는 아름다움을 넘어서 고통과 비극적 깊이를 가지게 합니다. 빈 컵의 하오에 돌연히 등장한 죽은 새의 살점 같은 꽃…죽음과 재생이 바로 이 아름다운 시간(하오)과 공간(빈 컵)에서 합일된 것이지요. 이 짧은 시에서 오는 긴장과 전율…그것은 바로 빈 컵의 하오라는 순수공간에 채송화로 비쳐진 죽음과 재생의 음영 때문이 아닐까요?

이 진 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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